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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관세 혼란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정착되고 나면, 미국은 훨씬 더 강력하고 직접적인 무기를 꺼낼 것이다. 바로 수출통제다. 관세는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수단이지만, 수출통제는 아예 특정 기술과 제품의 흐름을 차단해 버리는 외과수술용 메스와 같다.
미국의 진짜 목표는 단순한 무역 불균형 해소가 아니다. 중국의 기술적 성장과 자립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이미 그 신호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인의 미국 유학을 어렵게 만드는 조치들도 그 예다. 인재 양성까지 방해하려는 것은 단순한 무역전쟁을 넘어선 체제 경쟁의 성격을 보여준다.
미국은 지금까지도 반도체, AI, 양자컴퓨팅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수출통제를 강화해 왔다. 하지만 관세 정책이 미국 내 사법부의 판단이나 국민들의 물가 부담 증가로 인한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국은 더욱 직접적이고 강력한 수출통제로 무게중심을 옮길 것으로 예상된다.
수출통제의 무서운 점은 그 범위가 중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우방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너희가 중국에 팔면, 우리는 너희에게 팔지 않겠다"는 식의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ycott)이 일상화될 것이다. 이미 네덜란드의 ASML이나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이런 압박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미국의 방산업체 RTX는 직원들이 방산 기밀이 들어있는 노트북을 들고 해외 출장을 갔다는 이유 등으로 수출통제 위반으로 2억 달러의 벌금을 물기도 했다. 그만큼 복잡하고 무심코 저지른 실수에도 엄청난 벌금이 따라 오는 것이 수출통제다.
새 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다. 2024년 기준 대중 수출은 1330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19.5%를 차지한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의 핵심 안보 파트너이자 첨단 기술의 원천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수출통제가 본격화되면 한국 기업들은 극도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중국 시장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 기술과 부품 공급을 포기할 것인가.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선택이다.
더 복잡한 것은 수출통제가 관세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는 점이다. 관세는 단순히 세금을 더 내면 되지만, 수출통제는 아예 거래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게다가 기술의 최종 사용자(end-user)까지 추적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우리 기업들이 중국에 수출한 제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무작정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전략적이고 치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쉽지 않지만 네 갈래 길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 기술 주권의 확보다. 핵심 기술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기술 개발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예를 들어 K-반도체 벨트나 이차전지 생산 기지 구축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 민간 기업이 R&D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미국도 중국도 아닌 '제3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둘째, 수출·공급망 다변화 전략이다. 중국 시장에만 의존하지 말고 동남아시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등 신흥 시장으로 수출 시장을 다변화해야 한다. 동시에 공급망도 다변화하여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셋째, 규제 대응 역량의 강화다. 제재준수프로그램(SCP)과 마찬가지로, 기업 내부에 수출통제 대응 시스템을 미리 구축해야 한다. 어떤 기술이 통제 대상인지, 어떤 기업과 거래하면 안 되는지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정부는 가이드라인과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해 민간 기업의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역량을 높여야 한다.
넷째, 전략적 모호성의 활용이다. 모든 상황에서 명확한 입장을 밝힐 필요는 없다.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양쪽 모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싱가포르나 스위스 같은 국가들이 이런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수출통제의 강화는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새로운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제한하면서 대체 공급업체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이런 틈새를 파고들어 우리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이 자체 기술 개발에 나서면서 한국의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에는 새로운 협력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현재의 위기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것이다. 미중 갈등은 단기간에 끝날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내다보고 우리만의 생존 전략을 세워야 한다.
관세의 폭풍이 지나가면 수출통제의 태풍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부터 정부·기업·연구기관이 손잡고 기술 확보, 시장 다변화, 컴플라이언스 강화, 전략적 외교 역량을 키워야 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을 찾아야 할 때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