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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하 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전문위원 |
역사적으로 경제적 침투는 종종 군사적 정복의 발판이 되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제 강점기 이전 일본의 한국 경제 침략이다. 일본은 자국 은행인 일본제일은행의 지폐를 조선에 유통시키며 한국의 화폐 주권을 잠식했다. 1905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일본은 한국의 백동화를 일본 화폐로 강제 교환하게 했고, 상인들에게 무담보 대출을 제공한 뒤 상환 시점에 신화폐 가치를 조작해 경제적 종속을 가속화했다. 그 결과, 한국 상인들은 빚더미에 앉았고, 일본 화폐가 조선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총칼이 오기 전 이미 경제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식민지 시대가 끝난 후에도 경제를 무기화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같은 기구는 개발도상국에 대출을 제공하며 경제 구조를 선진국에 유리하게 재편하도록 압박해왔다. 예를 들어, 단일 작물 경제를 강요하거나 채무의 굴레를 통해 신흥국을 통제하는 방식은 신식민주의의 한 형태로 비판받는다. 미국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 잡은 이후, 이러한 금융 패권은 더욱 공고해졌고, 경제 제재와 같은 새로운 무기로 활용되었다.
오늘날 디지털 경제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패권의 새로운 무대로 떠올랐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에 가치가 연동된 암호화폐로, 현재 시장은 미국 달러 기반의 USDT와 USDC가 장악하고 있다. 2024년 기준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시장 규모는 약 310조 원에 달하며, 이는 디지털 세계에서 달러의 패권이 확대되고 있음을 뜻한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넘어 결제와 금융을 주도하며,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다.
미국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전략적 자산으로 삼아 디지털 패권을 강화하고 있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는 「디지털 금융기술 미국 주도권 강화」 행정명령을 통해 민간 주도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육성하고, 해외 발행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양면 전략을 펼치고 있다.
미국이 우리의 우방국이라고 할지라도 경제적인 침식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이미 2025년 1분기 기준, 국내 디지털자산 거래소의 스테이블코인 거래액은 56조 9천억 원을 넘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국내에서 물품을 구매할 수도 있는 결제 서비스까지 등장했다. 통화 주권이 무너지고 경제가 침식되는 역사가 재현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필두로 국제 금융 질서가 재편되고 있다. 미국이 앞장서고, 중국도 깃발을 들었다. 유럽과 일본도 뛰어들었다. 강대국들이 앞다투어 자국 통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으로 디지털 경제영토 확장에 나선 것이다. 우리나라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통화주권과 미래 금융 산업 주도권을 모두 잃을 수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선택이 아닌 필연이다.
이미 미국과 중국이 앞서 움직이고 있는 현시점에서, 한국판 스테이블코인을 하루빨리 준비하여 새로운 통화 패권 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정부의 과감한 정책 지원과 민간의 기술력이 결합된다면, 한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화폐 질서에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행동에 나설 때다.
이영하 전 감사원 특조국장/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