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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2천 년 넘게 하나의 나라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이할 뿐 아니라 신비하게 여겨집니다. 14억 인구의 대륙 국가가 어떻게 공산당 일당 독재로 일사불란하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거의 1억 명에 가까운 공산당원들이 견고하게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이라지만, 왜 중국의 엘리트들은 다른 나라의 엘리트와 달리 자발적으로 일당 지배도 모자라 일인 독재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수천 년 전승된 중국 문화가 중국인의 사고 습성과 행동 패턴을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집체적이고, 더 복종적이며, 덜 개인적이고, 덜 고립적으로 만든 까닭일까요? 아니라면 오늘날 중국인들은 베이징 원인(猿人)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한 다른 계통의 호모 사피엔스라서 바로 일당 독재와 일인 지배를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요? 문화인가요? 유전자인가요? 아니면, 문화와 유전자의 교묘한 상호 작용일까요?"
◇ 공산당 일당 지배와 중화 제국의 유산
중국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 사이에 본질적인 유전적 차이는 있을 수 없다. 한때 베이징 원인이 현대 중국인의 공동 조상이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오늘날 호모 에렉투스가 중국 땅에서 독자적으로 진화했다는 가설은 거의 부정된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의 유전자를 보면 99.9% 이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인간은 모두가 같은 유전자를 가진 단일 종의 호모 사피엔스다. 20세기 인류를 세계 전쟁의 광란에 몰아넣었던 인종(人種, race)이란 개념은 생물학적 근거가 없는 비과학적 통념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종이란 피부색, 얼굴 생김, 신체 골격 등 피상적 특징을 인간 사이의 본질적 차이로 간주하게끔 오도하는 그릇된 편견일 뿐이다. 사회과학적 상투어를 빌자면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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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 지속됐다는 사실보다 오늘날 중국의 중앙집권적 일당 지배의 현실을 더 잘 말해주는 단서는 없다. 전통 시대의 황제 중심 체제가 중국의 공산화 이후엔 레닌의 민주집중제란 이름을 빌려서 실은 마오쩌둥이란 독존의 지도자를 만들어냈다. 2000년에 걸친 중화 제국 황권 통치의 경험이 없었다면 과연 공산주의적 1인 지배의 기괴한 현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 중화 제국의 역사를 연 시황제의 위업
고대 중국 서부 변방에서 일어난 진(秦)나라의 31대 군주 영정은 파죽지세로 강력한 병마를 몰아서 육국(六國)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는 550여 년이나 이어지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종식하고 중국사 최초의 통일 제국을 창건한 후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를 칭했다. 황제란 전설 속의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를 아우르는 신조어였고, 시(始)란 초유의 사태를 의미하는 접두어다. 시황제는 역사상 처음으로 온 천하를 다스리는 독존(獨尊)의 최고 권력자를 의미했다.
진 제국의 창건은 과연 시황제의 칭호가 정당할 만큼 위대하고 획기적인 위업이었나? 시황제가 49세의 나이로 별세하기 무섭게 육국(六國)의 반란에 부딪혀 모래성처럼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 15년 단명의 제국이었음에도?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이겠지만, 이에 대한 역사학계의 일반적 답변은 "그렇다!"로 귀결된다. 사상 초유의 최고 권력자답게 시황제는 전 영토를 아우르는 통일된 행정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의 여러 지역에는 지방의 맹주가 독자적 정권을 이루고 있었는데, 시황제는 그러한 봉건적 군웅할거의 시대를 종식하고 전국을 38개 군(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 1000개가 넘는 현(縣)을 두었다. 중앙정부는 각 군엔 군수를 파견하고 현에는 현령을 임명하는 중앙집권적 행정 체계를 완성했다. 또한 그는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지역 화폐를 모두 철폐하고 표준화된 반량전(半兩錢)을 도입했으며, 법가의 일반 원칙에 따라 모두에 균등하게 적용되는 법률을 반포했다. 시황제가 이룩한 통일 제국은 고작 15년 후에 무너졌지만, 그 통일 제국의 시스템은 곧바로 이어진 한(漢) 제국으로 계승되어 2000년 중화 제국사를 열었다.
장구한 중국 문명사에서 통일 제국의 역사는 고작 2천 년에 지나지 않는다. 진 제국 출현 이전까지 고대 중국은 각 지역에 할거하는 수많은 국(國)의 느슨한 연합체로 존속되었다. 유가 경전의 전설적 기록에 따르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지배하던 때는 태고의 유토피아에선 만방(萬邦), 곧 1만 개의 국이 공존했고, 탕왕(湯王)이 상(商)나라를 세울 땐 3천 개의 국이 존재했으며, 서주(西周)의 전성기엔 "천팔백국(千八百國)"이 있었다. 왜 고대의 사상가들은 태고로 올라갈수록 더 많은 수의 나라들이 공존했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들은 진시황이 구축한 통일 제국을 역사의 암흑기로 그려야만 했을까? 이 점에 대해선 다음 회에 더 깊이 논하기로 하고, 우선 통일 제국 출현 이전 중화 문명의 태동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 싼싱두이, 고대 중국 쓰촨의 잊힌 문명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보면, 강변의 비옥한 땅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을 이뤘고, 여러 마을이 서로 교역하고 충돌하는 과정에서 도시국가가 형성되었으며, 넓은 영토를 아우르는 연방적 질서가 만들어졌다. 고대 중국에서 국가가 나타나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널리 알려진 중국 고고학계의 정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신석기 문화는 중원(中原)뿐만 아니라 전 지역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상호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중국 전역에 독자적인 신석기 문화가 꽃피었다는 고고학적 사실은 고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이미 문명화의 길을 가는
지역적 문화 기반이 마련돼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의 전통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듯 중원의 황하 유역에서 일어난 문명이 야만 상태로 남아 있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됐다기보다는, 여러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소규모 국가가 발생했고, 지역적 경쟁 속에서 문명의 발전이 빨라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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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