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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종 칼럼] 스페인 내전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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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6. 18. 17:50

정기종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1936년 7월 17일 발발해 2년 8개월 넘게 계속된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서막과 같다. 1930년대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와 같은 극우세력이 등장하자 스페인에서는 공산당과 사회당, 자유주의파의 연대로 '공화파(Republicans)'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936년 2월 19일 총선 결과로 공화파가 집권하자 정국은 난항에 부딪혔다. 이후 국왕 알폰소 13세는 국외로 망명하고 기득권 세력인 봉건지주와 가톨릭 성직자,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파(Nationalists)'의 쿠데타로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페인 내전은 지정학적으로 사실상 유럽 열강의 대리전이었고 스페인의 철광석과 망간, 구리, 유황은 유럽의 군비 증강에 필요한 자원이었다. '국민파'를 지원하는 이탈리아의 파병에 이어 독일도 8월 1일 전투기 6대와 대공포 20문을 시작으로 전차와 대포 그리고 1만4000여 병력을 보냈고 포르투갈도 약 1만명을 파병했다. 한편 '공화파'를 지원하는 소련은 약 3000명 병력과 조종사 772명을 파병했고 전투기 31대를 적재한 선박이 스페인 도착 후 10월 29일 첫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멕시코의 소총 2만정 및 탄약 지원과 함께 50여 개국에서 약 6만명의 지원병들이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다. '공화파' 보유 전투기 350대는 '국민파'의 600대에 비해 열세였고 소련이 지원한 차이카(Chaika, 갈매기)로 불리는 구형 복엽기 93대는 1937년 중반 독일제 신형 전투기 메서슈미트가 참전하면서 73대가 격추됐다. 피카소는 '게르니카(Guernica)'에서 독일공군의 무차별 민간인 폭격을 그림으로 남겼고 프랑스와 영국의 방관과 함께 '공화파' 인민전선은 무너졌다.

내전 중 전사한 약 20만명(공화파 11만명, 국민파 9만명)의 전투병력 외에 스페인 일반국민의 희생은 컸다. '제5열'로 불리는 아군 내부의 숨은 간첩을 제거하기 위해 '국민파'는 즉결심판 사형을 허용했고 이들을 색출해 학살하는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누구나 감시대상이 되었고 자신이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허위로 고발할 수도 있었다. 양대 진영이 보복학살을 벌이면서 '국민파' 점령지에서 10~20만 명 그리고 '공화파' 점령지에서 5~7만2천 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스페인 민족의 격정적 성격은 폭력의 잔인성을 더했고 약 50만 명의 공화주의자들이 프랑스로 탈출했다.

안토니 비버(A. Beevor)는 '스페인 내전사(the Battle for Spain)'에서 '선전과 심리전'의 효과를 주목했다. 그리고 군중심리를 고조시키는 언어폭력이 국내외적으로 끼친 영향을 설명했다. 여기에는 종교적 배경도 컸고 '공화파' 무신론자 공산당의 성직자 살해와 교회파괴 소식은 국제사회의 경계심을 고조시켰다. 가톨릭 사제, 수도사, 수녀 7000여 명이 살해당했고 가톨릭 자매국 이탈리아는 내전발발 2주일 후 7월 30일 '국민파' 지원을 개시했다. 병력 7만5000명과 전투기 48대, 기관총 1만정, 단총 24만정, 야포 1930문을 지원했고 해군 함정과 잠수함 90여 척도 '공화파' 지원물자를 선적한 선박들을 파괴했다. 난민들은 과장된 경험담으로 기자들에게 선정적인 기삿거리를 제공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프랑코 장군의 언론 보좌관은 미국 기자에게 "남자 3분의 1이 죽어도 프롤레타리아 국가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6·3 대선 후 외신은 차기 한국대통령은 양극단으로 분열된 국가를 치유하고 안정을 가져와야 할 엄중한 과제를 받았다고 평가했다. 12·3 계엄선포로 갑자기 실시된 대선은 그간 진행된 일련의 상황인식에 대한 정당 간의 깊은 괴리감과 상업화된 저널리즘으로 인해 정치투쟁이 재연될 후과를 남겼다. 더욱이 국제정세가 미증유의 불안정성 속으로 진입하면서 대한민국은 동북아의 린치핀(Linchpin)이라는 평가처럼 주요국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정명가도(征明假道) 주장이나 병자호란에서 명(明)을 침공하기 전에 조선을 공격한 청(淸) 그리고 한국전쟁에 개입해 38도선 분단을 고착화한 중국과 소련의 사례는 모두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말해준다. 1905년 7월 27일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아시아를 순방 중인 미국 전쟁부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 H. Taft)에게 러일전쟁의 원인제공자는 한국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한국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분명히 다른 강대국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즉흥적으로 체결하는 이전 습관으로 되돌아갈 것이고 전쟁 전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국제적인 합병증이 재발할 것이라고 '한국병합불가피론'을 강변했다.

2025년 우리 사회가 대규모 민중봉기나 쿠데타가 감행될 정도의 우매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이 국제적인 합병증을 불러올 만큼 무모한 정책을 구사하는 유아독존(唯我獨尊)식의 국가도 아니다. 그러나 대선 이후 정치적 갈등이 과열하면 국내외적으로 예상치 못한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람시(A. Gramsci)의 문화전쟁과 진지전처럼 장기간의 소모적 투쟁으로 국력을 낭비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나 군사와 경제의 안보 취약성을 높이고 미래세대에는 잘못된 정치학습이나 심리적 좌절감을 주게 될 것이다. 상대방을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대결은 자유민주주의의 법질서를 파괴하고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불러온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는 우리뿐만 아니라 동북아와 세계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위한 책임과 역할이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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