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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중화 제국의 장기 지속 비결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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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6. 22. 18:01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43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유럽에서도 한(漢)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로마제국이 들어섰지만, 머잖아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고, 서로마는 곧 수십, 수백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어 봉건 상태로 들어갔죠? 400여 년 지속됐던 한 제국도 삼국(三國)으로 갈라졌고, 결국 위진(魏晉)·남북조(南北朝)의 분열기가 펼쳐졌죠?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을 보면 동로마 비잔틴 제국만큼의 지속력도 없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왜 유럽과는 달리 중국은 다시 제국적 질서를 되살려 황제 중심의 통일 정부를 20세기 초반까지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외계인 미도의 질문이다. 진정 세계사의 수수께끼라 할 만하다. 2000년 지속된 중화 제국은 실로 예외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 전근대 국가와 현대 국가의 근본적 차이

산업화 이후에 나타나는 현대 국가는 교통, 통신, 군사력, 경찰력 등 모든 면에서 전근대 국가와는 비할 바 없이 강력한 행정력을 갖추게 된다. 진시황이 수레바퀴의 궤도를 통일했다지만, 현대 국가의 도로망과 비교하면 원시적 수준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현대 국가는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 빛의 속도로 정보를 주고받는 통신망, 전 국민을 살피는 감시망, 모든 경제 활동에 세금을 물리는 조세권, 어떤 반란 세력과 범죄 조직도 용납지 않는 실로 막강한 군사력과 경찰력을 갖게 되었다. 디지털 혁명 이후 현대 국가의 행정력은 더욱더 강화되는 추세다.

그러한 현대 국가의 권력 기반에 비하면 전근대 제국의 행정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전근대 제국의 질서는 무엇보다 행정력의 한계로 인해 장시간 지속되기 어려웠다. "천하대세는 나뉜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다시 나뉘게 마련(天下大勢, 分久必合,合久必分)"이라는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첫 구절이 그 점을 웅변한다. 한 영웅이 일순간 넓은 지역을 정복한다 해도 장시간 그 넓은 영토를 지배하기가 쉬울 리 없었다. 전근대 대다수 제국은 넓은 지역으로 팽창하다가 어느 순간 행정적 한계에 부딪혀서 결국 여러 지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거대 제국을 일사불란하게 유지하기 위해선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먼 지방까지 미칠 수 있도록 행정력을 확충해야만 하는데,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전근대 제국은 실상 큰 영토를 지탱할 만한 기반 권력(infrastructural power)이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서한(西漢) 시대의 병마용(兵馬俑)
서한(西漢) 시대의 병마용(兵馬俑)
◇ 중화 제국의 장기 지속 비결

그 점에서 중화 제국의 역사는 표면상 예외적인 통합력과 지속력을 발휘했음은 분명하지만, 현대 국가처럼 먼 지역에까지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유럽처럼 중화 제국의 여러 지방에는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장악한 호족(豪族)들이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한대(漢代) 이후 중화 제국의 질서는 실제로 지방을 장악한 호족들과의 정치적 타협 위에서 성립되었다. 바로 그러한 중화 제국의 복합적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선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봉건제"라는 모순 형용의 개념이 필요할 정도다. 실제로 중화 제국의 지방 세력을 깊이 탐구한 20세기 일본의 저명한 역사가들은 그런 개념을 사용해서 중화 제국사를 설명했다. 중화 제국이 2000년 넘게 존속됐던 비밀은 지방분권적 사회 시스템 위에 중앙집권적 통치 구조를 덧씌웠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왜 한나라 이후 중화 제국사에서 모든 정권이 제국의 기초 제도를 닦은 진시황(秦始皇)을 역사의 악인(惡人)으로 만들어야 했는지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군현제를 도입하여 중화 제국의 기초를 닦은 진시황은 지방 자치와 호족 엘리트의 존재 기반을 허무는 획일적 법가 사상을 국시로 내걸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진 제국은 육국(六國)의 반란에 직면하여 불과 15년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그 점을 잘 아는 한 제국의 유가 경학자들은 유교 이념을 국교로 삼아서 유가적 제국 질서를 확립했는데, 묘하게도 유가 경전은 하나의 통일제국이 아니라 다수의 제후국이 공존하는 분봉제를 이상화한다. 바로 거기에 중화 제국이 장기 지속된 비밀이 숨어 있다면 과언일까.

동한(東漢)시대 유가(儒家)경전을 새긴 석경(石經) 조각
동한(東漢) 175-184 시기에 유가(儒家) 경전을 새겨 넣은 석경(石經)의 조각
◇ 서주(西周)의 분봉제, 천팔백국(千八百國)의 이상

군웅이 할거하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정립한 선진(先秦) 유가 사상은 문명을 개창한 성왕(聖王)의 통치를 이상화했다. 공자와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우·탕((堯·舜·禹·湯)과 문·무·주공(文·武·周公)의 위업을 칭송했다.

놀랍게도 공맹이 이상화한 성왕의 통치는 진시황(秦始皇)의 천하통일 이후 전개된 2000여 년의 중화 제국의 질서와는 정반대되는 봉건(封建) 질서였다. 중앙정부가 전 영토를 다스리는 통일 국가의 체제가 아니라 자치(自治)를 이룬 여러 나라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시스템이었다. 쉽게 말해, 중앙집권적 통일 제국이 아니라 지방분권적 연방 질서였다. 실제로 유가 경전엔 요·순 시대와 하(夏)나라 초기에는 만방(萬邦)이 조화롭게 공존했다는 고대의 전설이 기술되어 있다. 반론이 없지 않지만, 경전(經典)의 문구 하나하나를 신성시하는 경학자들은 만방을 "1만개의 나라"란 의미로 새겼다. 그들은 '영토는 작고 인구는 적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을 강조했는데, 그래야만 군주가 백성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챙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가 경전에 따르면, 요·순 시대의 만방은 하나라 말기로 가면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하나라 마지막 폭군 걸(桀)을 치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3000개의 제후국을 분봉했는데, 세월이 흘러 상나라 말기가 되면 제후국의 숫자가 확연히 감소했다. 문왕과 무왕은 800개의 제후국을 규합하여 주나라를 열었고, 어린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한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이 서주(西周)의 법제를 정비했을 때는 천팔백국(千八百國)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1800개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중국의 경학자들은 주공이 정비한 서주의 질서는 상고(上古)의 유토피아가 무너진 이후 가까스로 되살린 작은 평화일 뿐이었다. 요·순 시대의 대동(大同)에 대비되는 소강(小康)의 질서였다. 바로 그 소강의 질서는 주(周)나라 왕실의 권위에 의해 유지됐다고 믿었다. 주나라 군주는 단순히 한 나라의 국왕이 아니라 각기 자율적으로 통치되던 천팔백국 위에 군림하는 공동(共同)의 주군(主君), 곧 공주(共主)라 여겨졌다.

오매불망 주공을 흠모했던 공자는 춘추의 혼란기에 바로 그 소강의 질서를 되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는 주변의 중소국을 병탄하여 큰 규모로 성장한 영토국가들 사이의 패권 다툼을 말세의 징후라 여겼던 인물이다. 서주의 분봉제는 이미 해체되어 주공이 분봉했던 '천팔백국'은 사실상 춘추오패의 다섯 나라로 수렴되던 상황이었다. 그때 공자는 다시 주공이 세운 천팔백국의 이상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방향으로 거꾸로 돌리려 노력했던 복고주의자였는데….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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