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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시장 선진화 중심엔 상법 개정안이 필수 요소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기존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는 것이다. 그간 기업들이 오너일가의 승계나 대주주 이익만을 위해 주주가치를 훼손시킨 행태에 제동을 거는 내용이다. 특히 자사주 의무 소각을 통해 주가 부양까지 이뤄내는게 골자다.
문제는 여전히 '대주주의 1주와 일반주주의 1주는 다르다'고 여기는 기업들이다. 작년부터 밸류업 정책을 추진해오면서 주식시장에선 '묻지마 유상증자'와 같은 행태를 비판해왔는데, 올해 들어서도 기업들의 관행은 여전한 모습이다.
최근 자사주 전량을 교환사채(EB)로 발행하겠다고 공시한 태광산업이 대표적이다. 태광산업은 자사주 27만여주를 교환대상으로 하는 EB발행에 나서겠다고 했다. 규모로는 3000억원이 넘는다. 신사업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이라는 명목이지만, 사실상 사용 목적이 불분명하고, 자사주 교환 대상도 공시하지 않음으로써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정정명령을 부과받았다.
자사주를 EB발행에 활용하면 주가가 하락한다. 시장에선 유상증자와 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EB의 표면 이자가 0%라는 점은, 투자자들이 수익을 내기 위해선 태광산업 27만주를 시장에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식이 시장에 대거 풀리면 주가 하락은 당연한 순이다. 당장 자금 조달을 위해 향후 주가 하락이 뻔한 일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대신증권에 따르면 2020년 이후 자사주 교환형 EB발행 기업수는 매년 20건 안팎이었는데, 올해는 반 년만에 자사주 교환형 EB발행 기업수가 17곳에 달했다. 상법 개정안을 앞두고 기업들이 서둘러 자사주를 처분하고 있다는 얘기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 이후엔 이같은 EB발행은 주주들의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자사주를 주주가치 제고 보다 기업이나 대주주 이익에 활용하겠다는 의미에서다.
수년전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목적으로 취득한 자사주는 최근들어 기업의 자금 조달 용도로 바뀌고 있다. 자사주 취지에 반하는 식으로 경영에 나서는 기업들의 행태는 코스피 5000과는 거리가 멀다. 나홀로 성장한 기업들이 어디 있으랴. 기업들은 그간의 성장을 함께 해 온 주주들을 잊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