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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은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아닌, 도로의 가드레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법률의 근본적 목적은 사회적 질서의 유지와 이해관계자들의 권익 보호에 있으며, 블록체인 산업 내에서 이는 투자자 보호, 자금세탁 방지(AML), 개인정보 보호, 저작권 침해 방지 등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한다. 가드레일이 부재한 고속도로에서의 무제한 속도 추구는 일시적인 자유를 제공할 수 있으나, 결국 예측 불가능한 사고와 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반대로, 체계적으로 설계된 법률 프레임워크는 산업 내 신뢰성을 제고하고,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확보함으로써 시장 참여자들의 안정적 성장을 촉진한다. 예를 들어, 미국 SEC의 증권 규제나 EU의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정은 이러한 가드레일의 사례로, 블록체인 기반 자산의 투명성을 강화하여 투자자 신뢰를 구축하고 있다.
기존 법률은 20세기 산업 구조와 중앙 집중형 경제 모델을 기반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에, 블록체인의 탈중앙화(decentralization)와 스마트 컨트랙트(smart contracts) 같은 혁신적 요소를 적절히 수용하기 어렵다. 예컨대, 전통적인 금융 규제 틀을 통해 DeFi(Decentralized Finance)를 해석하려 할 때, 중앙 기관의 부재로 인한 감독 어려움과 책임 소재 불분명 등의 충돌이 발생한다.
법률이 기술 발전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 산업 주체들은 법적 불확실성에 처해 사업 확장을 주저하게 된다. 필요한 것은 무리한 규제 집행이 아닌, 기술의 고유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입법 프레임워크의 구축이다.
첫째,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 제도를 확대하여 일정 범위 내에서 규제를 유예하고, 실험적 적용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혁신을 촉진해야 한다. 이는 제한된 환경에서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테스트하며 법적 문제를 사전에 식별하는 데 효과적이다. 둘째, 기술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한 후 규제 대상을 명확히 정의하는 기술 친화적 입법이 필요하다. 이는 블록체인의 투명성과 불변성을 활용하여 규제 준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NFT(Non-Fungible Token)와 관련된 저작권 규제에서 창작자 권리를 강화하는 동시에 디지털 소유권 이전의 효력을 인정하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블록체인 거래의 국경 초월적 성격을 감안하여 글로벌 규제 흐름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국제 협력이 요구된다. G7이나 FATF(Financial Action Task Force)의 자금세탁 방지 가이드라인처럼, 표준화된 국제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국가 간 규제 차익(arbitrage)을 방지하고, 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호사의 역할은 단순히 위법 여부 판정에 그쳐서는 안 된다. 변호사는 새로운 블록체인 비즈니스 모델이 기존 법률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나아가 법률이 어떻게 개정되어야 하는지를 전략적으로 제시하는 컨설턴트로 거듭나야 한다. 이는 혁신과 규범 사이의 통역자이자 협상자로서의 기능으로, 예를 들어 DeFi 플랫폼의 법적 구조 설계에서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의 거버넌스 모델을 법인화하거나, 스마트 컨트랙트의 법적 효력을 강화하는 계약 조항을 제안하는 역할을 포함한다.
또한, 입법 과정에 참여하여 기술 전문가와의 협력을 통해 균형 잡힌 규제를 도출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법률은 블록체인 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아니라, 더 멀리 도약하기 위한 탄탄한 도약대가 될 수 있다.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연한 법률과, 법적 규범을 존중하는 책임 있는 혁신이 상호 보완될 때, 블록체인 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공익을 증진하며, 기술과 법률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열어갈 것이다.
※본란의 기고는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구은석 KES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 한국디지털자산평가인증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