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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욕과 세계 제국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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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07. 17:45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53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 헬레니즘 제국의 건설

북부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기원전 382-336)는 코린트 연맹을 결성하여 그리스 남부의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스 내부 갈등을 봉합한 후 그는 페르시아 정벌을 계획했으나 불과 마흔여섯 살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왕위를 계승한 스무 살의 알렉산드로스 3세(기원전 356-323)는 334년 과거 그리스를 침략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복수를 명분 삼아 아시아 정벌에 나섰다. 아나톨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리우스(Darius) 3세(재위, 기원전 336-330)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를 분쇄한 후 그는 파죽지세를 몰아 오늘날 파키스탄의 펀자브 지방까지 쳐들어갔다.

세계 끝까지 간다는 10년의 원정 끝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 세계와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이집트를 통합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제국은 얼마 못 가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왕조로 분열됐다. 불과 서른세 살의 나이로 그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제국은 무너졌지만, 그리스, 페르시아, 이집트가 절묘하게 융합된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는 3세기 가까이 이어졌다.

인류 역사에서 헬레니즘 시기는 여러 지역이 결합하여 다문화가 뒤섞이는 최초의 세계주의적 문명이었다. 알렉산드로스가 건설한 여러 신도시에는 도서관이 세워지고, 대학이 창설되었다. 그리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축적된 지식과 지혜가 융합되어 새로운 학문과 과학이 발전하고, 예술과 문학이 꽃피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
이수스 전투에서 명마(名馬) 부케팔로스를 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 위키피디아
◇ 그리스 천문학과 바빌로니아의 관측 기록

인류사 최초로 지구의 둘레를 거의 정확하게 계산해 낸 인물은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 of Cyrene, 기원전 대략 276-195)였다. 그는 수학, 지리학, 천문학, 음악이론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고,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그리스 문학, 철학, 과학을 공부하고, 그리스어로 글을 썼던 그리스인이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그리스 본토가 아니라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그리스 식민지 키레네였다. 젊은 시절 아테네에서 유학했던 에라토스테네스는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만든 헬레니즘 제국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그곳엔 당시 지구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 있었다. 그는 그 도서관의 관장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지구의 원주를 계산해 냈다는 사실은 그리스인의 관심이 도시국가의 한계를 벗어나 전 세계로 향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한 관점의 변화는 그리스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창조적으로 결합한 결과였다.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들이 천체의 운행 원리와 코스모스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이론적 사유에 몰두했다. 반면 바빌로니아인들은 해와 달과 별들이 움직이는 천체 현상을 세심히 관찰하여 정확하게 기록하는 전통을 자랑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메소포타미아를 정벌함으로써 그리스 천문학자들은 비로소 천년 세월 동안 바빌로니아인들이 집적한 정교한 천체 운행의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헬레니즘 시기 천문학의 발전은 서로 다른 두 문명 사이의 교섭이 역사 발전의 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폴리스에 집착하던 그리스인은 세계 제국의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문화를 흡수한 새로운 그리스 문명은 세계주의의 용광로로 거듭나게 되었다. 과학, 예술, 문화, 문학, 철학, 정치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헬레니즘은 세계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지금도 학자들은 헬레니즘을 헤브라이즘과 더불어 서양 문명의 두 중심축으로 꼽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정복을 꿈꾸며 군사 정벌에 나섰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가 건설한 세계 제국은 인류의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뒤바꿨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알렉산드로스의 석관에 새겨진 마케도니아 군사의 모습
알렉산드로스의 석관에 새겨진 마케도니아 군사의 모습. 위키피디아.
◇ 제국의 출현, 역사의 필연인가?

"지구인의 세계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최초의 세계 제국(cosmopolitan empire)을 건설한 위대한 인물이군요. 도시국가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여러 문화 다민족이 함께 모여 사는 세계 제국의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면, 더 넓은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다채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궁금합니다. 과연 지구인의 세계사에서 제국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위대한 영웅의 출현이었을까요? 아니면 다수가 제국의 건설에 동참한 까닭일까요?"

최초의 세계 제국 형성을 둘러싼 외계인 미도의 질문이다. 지구인의 세계사에서 제국은 과연 왜 출현해야만 했을까? 천하 제패를 노리는 야심 찬 지역 맹주의 정복욕 탓일까? 식민지를 약탈해 사치와 향락을 누리려는 거상(巨商)과 대지주(大地主)의 탐욕 때문일까? 이교도를 복속시켜 개종시키려는 종교적 신념의 발로였을까? 정복욕, 탐욕, 신념 등도 중요한 변수일 수 있다. 그러나 소수 엘리트의 심적 동기만으론 제국의 출현이 온전히 설명되진 않는다. 동서고금 제국이 출현하는 과정을 거시적으로 조감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명확하게 관찰되기 때문이다. 제국 출현 이전엔 거의 예외 없이 장시간에 걸친 전쟁의 시기가 펼쳐졌다는 점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주변 지역에서 처음 형성된 아시리아 제국과 아케메네스 제국은 도시국가들과 왕국 사이의 장기적 전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중국사에서 최초로 통일 제국이 형성되기까지 참혹한 전국시대의 혼란이 이어졌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대혼란은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그리스 세계를 통일하고 외부로 팽창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로마 제국 역시 지속적 내전을 치른 이후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일어섰다. 기원전 3세기 인도에 세워진 모리안 제국도 알렉산드로스의 침략 이후 여러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군사적 각축전의 결과였다. 근세 유럽사의 대영제국, 프랑스 제국, 스페인 제국 등등 민족-제국(nation-empire) 역시 장시간에 걸친 중세기 왕조 전쟁과 봉건적 분쟁의 결과였다. 근세 일본사의 도쿠가와 막부(幕府) 역시 150여 년의 참혹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종식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들어섰다.

거시적 관점에서 인류사를 보면, 전쟁이 전쟁을 낳는 전쟁의 악순환이 결국 제국(帝國, Empire)의 출현을 정당화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국이란 넓은 대륙에서 다양한 문화 전통을 이어가는 다양한 지역의 다양한 종족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하여 지극히 높은 권좌에 오른 황제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단일 정부의 국가를 의미한다. 제국적 집권화는 한 지역에 여러 정권이 난립하는 봉건적 분권화의 정반대 원리라 할 수 있다.

18세기 이래 서구 열강의 압력 아래서 식민지나 반(半)식민 상태를 경험한 비서구권에선 지금도 제국(帝國, Empire)이나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란 낱말 자체가 악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지구 전역의 다수 민중은 제국주의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약소민족을 짓밟고 수탈하는 강대국의 횡포라 생각한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근현대 제국주의의 역사를 보면, 분명 그런 측면이 두드러짐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더 큰 관점에서 헬레니즘 시대를 조망하면 제국의 음과 양에 관한 근원적 물음이 떠오른다. 과연 제국의 출현은 인간의 삶을 더 곤욕스럽고 비참하게 했을까? 아니면 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했을까?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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