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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사에서는 전통 고유제와 연극 공연, 서예 퍼포먼스, 학술대회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참가자들은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현장에서 "인간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시 마주했다.
특히 학술대회 현장에서는 퇴계의 교육철학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연구자들의 발표가 이어지며, 서원이 단순히 과거의 박물관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잇는 교육 실험실임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행사장을 찾은 학생과 시민들은 무대와 토론, 전시를 오가며 인문학이 여전히 삶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직접 체감했다.
행사장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도산서원의 정신을 미래 교육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학술대회와 라운드테이블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퇴계가 강조한 경(敬) 공부, 즉 자기 성찰과 도덕적 실천이야말로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역설했다.
기술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고 데이터가 감정을 예측하는 시대일수록 '사람다움'을 지켜낼 힘은 스스로를 단련하는 인문학적 성찰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도산서원은 더 이상 과거의 유산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 인재를 길러내는 K-인문학의 플랫폼으로 새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필자가 몸담았던 성균관대학교 성균인성교육센터의 실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센터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다양한 교육을 펼쳐왔다. 대표적으로 '흥인·돈의·숭례·홍지'라는 이름의 인성함양 실천프로그램은 체험형 교육으로, 부모님께 감사편지를 쓰고 가족의 초상화를 그리며 서로의 마음을 살피는 미션을 통해 인간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한다. 한 학기 동안 2000여 명이 참여한 이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적 공감과 책임을 배우는 자리다.
또한 성균인성교육센터는 '학부모 공감 프로그램'을 통해 학부모와 학생이 함께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퇴계의 사상과 인성교육을 직접 체험하게 하여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 안에서 깊은 울림을 주고받도록 했다. 이 밖에도 '성균색 인성을 말하다' 프로그램은 동양 고전을 활용한 에세이 쓰기와 토론으로 진행된다. 학생들은 '논어' 등 고전의 구절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사랑(仁)과 정의(義) 같은 고전적 덕목을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한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모두 학생이 주체가 되어 실행되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힘을 길러준다.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기 성찰과 윤리적 판단을 체득하는 것이다.
더욱이 AI가 사람의 업무를 도우면서 인간에게 새로운 여유의 시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기계가 반복적이고 단순한 계산을 대신할 때, 우리는 그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까. 더 많은 소비와 더 빠른 경쟁으로 채우는 대신, 자신을 돌아보고 관계를 가꾸는 인문학적 성찰로 채울 때 그 시간은 진정한 가치가 된다. 퇴계가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에게 강조한 경(敬) 공부는 바로 그 자기돌봄의 핵심이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는 일, 친구와 오롯이 대화를 나누는 일, 고전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AI가 열어 준 여유가 오히려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역량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AI는 단순히 인간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 기회를 제공하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AI 시대의 인간은 이전보다 더 깊이 있는 사유와 더 넓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다. 인문학은 그 시간을 가치 있는 삶으로 바꾸는 안내서가 된다.
이번 도산서원 450주년 행사는 이러한 실천의 장을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원은 더 이상 박제된 문화재가 아니라, 과거의 지혜를 오늘의 삶과 연결하는 교육 현장이다. 성균인성교육센터의 인성캠프가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의 삶을 배우고, 학생들이 그 정신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때, 전통은 새로운 콘텐츠가 되고 교육은 K-인문학으로 진화한다. 이것이야말로 세계가 주목하는 K-콘텐츠의 깊은 뿌리다.
AI가 빠르게 진화하는 지금, 대학 교육은 지식 전달을 넘어 인간적 성숙을 이끌어야 한다. 도산서원과 성균관대학교가 보여준 사례는 전통 인문학이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님을 증명한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와 미래를 준비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 실천적 학문이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계산하지 못하는 인간의 존엄, 타인을 향한 공감,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길러내는 힘, 바로 그 힘이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갈 인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역량일 것이다.
한승일 책임연구위원은…
성균관대학교에서 유교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성균인성교육센터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과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연구 분야는 윤리학과 인식론이다. 주요 저서로 '챗GPT, 퇴계와 대화하다'(2024), '오늘 퇴계를 만나다'(2024, 공저), '지식권력과 모럴폴리틱'(2023, 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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