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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유생들은 전라도 전주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목숨 걸고 지켜냈다. 실록을 보관 중이던 4대 사고 가운데 왜적의 주요 침입경로에 있었던 한양 춘추관, 충청도 충주, 경상도 성주 사고는 전란 와중에 불타 소실되고 말았다. 만약 전주 사고본마저 소실됐다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재 가치가 높은 조선왕조실록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훌륭한 백업(이중화)시스템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창업군주 태조부터 25대 임금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망국의 왕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의 기록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의해 왜곡 편찬돼 실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총 1893권, 2억자 이상의 한자로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은 한글로 된 번역본을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릴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한다. 오는 2033년 완역을 목표로 21년간 영문 번역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조선시대 정치·외교·군사·경제·문화풍습·풍속·법률 등 일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했다. 왕의 선악이나 신하들의 간위(奸僞)까지 낱낱이 기록해 객관성과 신뢰성이 매우 높다는 평가다. 해서 많은 왕들이 실록의 전 단계인 사초(史草)를 보고 싶어 했으나 신하들이 온몸으로 막아냈다. 폭군 연산군이 조선 임금 가운데 최초로 사초를 강제로 들여다봤으나 그것 역시 일부 발췌본에 불과했다.
기록 못지않지 않게 보관 단계에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철저함을 기했다. 임진왜란 이전 4사고(四史庫) 체제이던 것을 임란 이후에는 5사고(五史庫) 체제로 분산 보관을 더욱 강화했다. 인조 재위시절인 1606년에 전주 사고의 원본, 교정본을 합해 조선왕조실록 5부를 다시 인쇄했다. 조정은 지방 중심지에 사고를 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한양 춘추관 내(內)사고를 제외한 지방소재 외(外)사고 4곳은 깊은 산속으로 옮겨 실록을 보관했다. 강화 정족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이 바로 그곳이다. 실록을 3년에 한 번씩 꺼내 말리는 포쇄 작업도 거쳤다. 이처럼 깊은 산속에서 승려들에게 관리를 맡긴 덕분에 이후 병자호란 등 전란에도 소실되지 않고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 정족산 사고 내 실록 일부를 약탈해 갔을 뿐 나머지 실록들은 구한말까지 비교적 안전하게 전해져 내려왔다.
조선왕조실록도 이처럼 보존을 철저하게 했는데 정부전산 심장부인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의 백업시스템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26일 발생한 대전 국정자원 전산실 화재 한 방에 국가 행정·업무시스템이 대거 멈춰섰다. 사고 발생 17일째인 12일까지도 복구율이 35%에 불과할 정도로 정상화 속도가 더디다. 우체국 쇼핑몰 폐쇄로 추석대목 특수를 날린 소상공인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2022년 '카카오 먹통', 2023년 '행정전산망 장애' 사태를 겪고도 이중·삼중의 운영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4~5중으로 분산해 보관에 만전을 기했던 선조들의 지혜를 조금만 배웠더라면 이런 참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회 과방위 소속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달 말 "우리 조상들이 조선왕조실록을 한양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 사고에 분산 보관했던 지혜를 떠올려야 한다"며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본만이 살아남아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듯 국가기간 서비스는 단순한 정비 이중화를 넘어 지리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데이터센터에 분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정한 데이터 이중화는 단순한 백업 카피를 넘어서 24시간, 365일 지속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구축돼야 한다"며 "대전·세종지역을 벗어나 영남권, 호남권에도 추가로 데이터센터를 건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행정안전부는 국정자원 시스템 이중화 장치 구축에 1조원 안팎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전 국민에게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지급하기 위해 편성한 예산 13조9000억원 가운데 7% 정도만 백업 시스템에 투입했어도 이번 '국가전산망 마비'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번 국정자원 화재가 공공부문의 '인력 우선, 자본 후순위' 투자 행태가 초래한 전형적인 실패라는 지적도 나온다. 공공기관은 원래 임금 복리후생 등 직원들 인력보상은 후하게 유지하는 반면, 시설 현대화나 시스템 업데이트 등 자본투자는 소홀히 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게 경제학 이론에 근거한 경험적 관찰이다. 따라서 단순히 관련 예산만 늘릴 게 아니라 공공부분의 자본투자가 확실히 이뤄지게 하든지 아니면 아예 예산을 민간의 활발한 자본투자를 활용하는 쪽으로 쓰는 것을 과감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설진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