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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업 규제를 가름 짓는 이 수치 기준들이 과연 무엇을 반영하는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리스크 수준을 뜻하는 것인지, 산업 구조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지배구조의 성숙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누구도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 기준들이 뚜렷한 실증 근거 없이 오랜 기간 행정편의적으로 누적돼 온 수치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기준들이 어떤 부작용을 낳고 있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로는 중복규제와 이중규제의 문제다. 같은 기업이 상법, 외부감사법, 공정거래법 등에서 열거하는 개별적인 '규모 기준'을 각각 충족해야 하므로, 지배구조·공시·외부감사 체계가 끊임없이 중첩·강화된다. 예컨대 상법은 자산 규모에 따라 지배구조 의무가 달라지는데, 기업이 자산 2조원 이상이 되는 순간부터 수십개의 지배구조 규제가 가중된다. 외부감사법 같은 경우에는 자산 500억원부터 외부감사 대상이 되며, 그 이후 단계별로 의무가 늘어난다. 이처럼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각 법령상의 규제들이 계단식으로 누적되어,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준수비용이 급증하게 된다.
두 번째로는 예측 가능성이 붕괴된다. 소위 '경계선 기업'은 자산총액의 미세한 등락만으로 규제가 온·오프된다. 실제로 자산 2조원 문턱을 넘겨 이사회와 위원회 구성을 전면 재편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재무구조를 조정하는 사례가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세 번째는 법령상 규모 기준과 실질 간의 괴리다. 자산총액은 어디까지나 '재무규모'에 불과하다. 그 수치가 어떻게 곧바로 지배구조 설계와 연결되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리스크는 업종, 복잡성, 내부통제 수준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현행 체계는 외관 하나로 기업 내부의 '질'을 재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실질보다 외형에 치우친 기준은 결국 다른 법령들과 자율규범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상법의 수치 잣대가 거래소 공시규정과 각종 모범규준으로까지 확산되면서, 모든 기업규범들이 이중·삼중의 부담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공시 대상을 기존 '자산 5000억원 이상 코스피'에서 '모든 코스피 기업'으로 확대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규제 설계의 중심이 점점 '숫자 중심-일괄 압박'으로 쏠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누적은 결국 성장 억제라는 부작용으로 귀결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차별규제'만 수백개에 달한다고 한다. 중소·중견기업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는 것을 회피하는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 현상을 낳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과 같은 이러한 세세한 규모별 차등을 해외 입법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은 연방법이나 주회사법 어디에서도 기업을 자산 구간별로 나누어 차등규제하지 않는다. 영국 역시 법령에서 자산 규모를 두고 이에 따라 법정 의무를 부과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증권거래소 규정이나 모범규준 등에서 '원칙준수·예외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으로 운용할 뿐이다. 일본 또한 기업을 규모별로 구분해 규제하는 제도를 두지 않는다.
근로자이사 제도를 운영하는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근로자 수를 기준으로 이사회 내 근로자이사의 비율을 정하고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기업 규모에 따라 지배구조를 달리 규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근로자 수와 근로자 대표성 간의 상관관계를 바탕으로, 기업의 재무적 규모보다 고용 구조와 참여권의 균형을 중시하는 제도적 설계에 기초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한 접근이 아니라, 자산총액과 같은 재무지표를 중심으로 기업 규모를 세분화하여 규제를 달리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세계적인 규제 흐름과는 동떨어진 이른바 한국만의 글로벌 비(非)스탠더드(global non-standard)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규제의 정합성뿐만 아니라, 글로벌 투자자에게도 이해하기 어려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 경제는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OECD 최하위권이다. 지금의 상향식 규제 누증은 기업의 스케일-업 의지를 꺾고 있다. 성장할수록 불리해지는 체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기업이 리스크에 비례한 의무를 부담하되, 그 외 영역에서는 스스로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고 동시에 설명 가능한 자율성을 보장받는 구조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정성과 투명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기업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일 것이다.
김영주 교수는…
성균관대학교 법학사, 미 워싱턴대학교(세인트루이스) 법학석사, 성균관대학교 법학박사. 현재 부산대학교 무역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연구 분야는 상법, 국제거래법, 기업지배구조 등. 대표적인 연구서로는 '사외이사 및 감사·감사위원 임면 제도에 관한 해외 입법례 연구(상장협, 2021)', '권고적 주주제안(상장협, 2022)' 등. 현재 한국기업법학회, 한국해법학회 편집이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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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부산대 무역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