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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50주년의 무대, 송희정이 빚어낸 어머니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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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0. 23. 08:26

2001년 토월극장에서 다시 예그린까지, 배우 인생이 걸어온 자리
광신이 아닌 인간의 보편으로, 도라 스트랑을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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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의 객석이 숨을 고르는 순간, 배우 송희정이 무대에 선다. 연극 '에쿠우스'의 50주년 기념공연에서 그가 맡은 인물은 알런 스트랑의 어머니 도라. 말보다 긴 정적이 많고, 침묵 자체가 서사의 무게가 되는 배역이다. 송희정은 그 침묵의 결을 세밀하게 다듬어 한 인간의 사랑과 죄책, 신앙과 절망을 관객의 눈앞에 번져 가게 만든다.

2001년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같은 작품의 다른 자리에서 다시 서 있다. "그땐 알런 말고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갔어요. 지금은 도라가 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너무 잘 보여요. 나이를 먹으니 그들의 마음이 보이네요."

그의 연극 인생은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됐다. 신촌 독수리다방 근처, 한 화가가 운영하던 작은 꽃가게였다. 복슬복슬한 수염의 사장이 아이들에게 꽃을 쥐어 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가끔은 잘못한 사람을 꾸짖는 풍경이 스무 살의 마음에 박혔다. "그분은 정말 정직한 어른이었어요. 어느 날 저한테 '넌 재주가 많으니 연극을 해보면 어떻겠니?' 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인생이 바뀌었어요."

그는 그날로 극단의 문을 두드렸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대에 섰는데, 너무 신기했어요. 합판으로 세운 무대 뒤에서 새끼손톱만 한 구멍을 뚫고 객석을 엿봤죠. 사람들이 웃고 울고, 그 얼굴들을 보는 게 그렇게 행복했어요." 두려움보다 설렘이 컸다. 매일 혼나면서도 매일 배웠다. 손짓, 시선, 걸음걸이, 무대 제작, 소품, 의상까지 모두가 그의 공부였다. "질문이 많았어요. 그래서 더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극단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첫 무대에 섰고, 그 이후로 자리를 잃지 않았다. "놀랍게도 30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설 무대가 있어요. 관객의 눈빛이 여전히 설레요."

출연
배우로서 전환점을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2001년의 '에쿠우스'를 꺼냈다. "한태숙 연출님, 박정자 선생님, 최광일 배우님과 함께한 공연이었죠. 그때는 '에쿠우스'를 누가 연출하고 누가 다이사트를 맡느냐가 연극계의 최대 화제였어요. 그 무대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배우로 인정받는 일이었죠." 그는 그 시간을 '배우로서 다시 태어난 시기'라고 했다. "연극계 최고 연출자와 최고 배우들을 가까이에서 봤어요. 매일이 공부였어요. 선배들의 호흡, 대사의 온도, 무대의 정적까지 다 새겨봤죠."

그 후 그는 '19그리고80', '레이디 맥베스', '광해유감' 등 다양한 작품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저를 배우로 만든 시간이에요. 무대가 두렵지 않다는 걸 처음 느꼈던 때죠."

무대에서 쌓은 시간은 여러 연기상으로 이어졌다. 2007년과 2009년 신춘문예 연기상, 2010년 거창국제연극제 연기상, 그리고 2024년 1번출구연극제 연기상까지. 그 이력에는 무대와 함께한 세월의 흔적이 차곡히 새겨져 있다.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이번 무대에서 그는 24년 만에 다시 '에쿠우스'를 만났다. 이번에는 도라 스트랑으로 서 있다. "그때는 내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 벅찼어요. 지금은 인물을 이해할 여유가 생겼죠. 도라는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아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에요. 그래서 더 아파요."

송희정은 이번 도라를 광신적인 어머니로 그리지 않았다. "보통은 '엄마가 이상해서 아이가 잘못됐다'고 쉽게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가고 싶지 않았어요. 엄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잖아요." 그는 연습 중에도 자주 눈물이 났다고 했다. "도라를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팠어요. 죄책감보다는 '기도'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죠. 지금은 도라를 연기할 때마다 '엄마의 기도'라는 마음으로 서요."

무대 위의 도라는 침묵이 길다. 하지만 그 침묵은 비어 있지 않다. 송희정은 말보다 몸으로 감정을 전한다. 그는 판소리와 무용을 공부해온 배우다. "판소리는 내 소리의 기능을, 무용은 내 몸의 기능을 인식하는 거예요. 내 몸의 기능을 잘 알수록 표현이 자유로워져요. 몸은 배우의 언어예요." 그는 자기 몸을 스마트폰에 비유했다. "휴대전화 기능을 몰라서 못 쓰면 답답하잖아요. 배우도 자기 몸의 기능을 알면 표현의 선택지가 무한해져요." 그의 도라는 손끝, 호흡, 눈빛으로 감정을 쌓아 올린다. "연기는 온몸으로 하는 일이에요. 감정을 억지로 짜내지 않고, 그 감각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게 중요하죠."

송희정은 침묵의 시간을 '듣는 시간'이라 표현했다. "말보다 듣는 게 훨씬 어려워요. 침묵의 순간은 듣고 있는 시간이에요. 이번 공연에서는 아들 알런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너무 눈물이 나요. 그 장면마다 가슴이 저려요." 그에게 연극은 듣기의 예술이다. 상대의 감정을 느끼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자신의 호흡을 찾아가는 일이다. "무대에서 상대의 에너지를 진짜로 받아야 진짜 연기가 돼요. 관객도 그걸 알아요."

공간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단번에 관객을 떠올렸다. "저는 관객의 눈빛이 좋아서 연극을 시작했어요. 가까이서 숨을 느끼고 시선을 나누는 게 행복하죠." 예그린씨어터는 배우와 관객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 그는 그 친밀한 시선이 부담이 아니라 설렘이라고 말한다. "집중하는 시간에 누군가가 온전히 나를 바라본다는 건 기적이에요. 같이 울고 웃고, 박수로 호흡을 맞출 때, 그게 연극이에요."

03
송희정은 무대를 위해 무대 밖의 일상을 다듬는다. "배우는 아는 만큼 인물을 만들어요. 그래서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어요. 요즘은 비워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힘을 빼는 게 정말 어려워요. 잘 쉬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더라고요." 일정이 겹치고 체력이 빠져나가는 날에도 그는 몸의 리듬을 놓치지 않는다. "편안해야 오래 가요. 긴장을 풀면 집중이 오히려 깊어지거든요."

'좋은 배우'란 무엇이냐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었다. "솔직한 사람이요. 감정에 솔직하고, 모르는 걸 척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그건 선을 넘지 않는 솔직함이어야 해요. 감정을 참지 못해 터뜨리는 건 진짜가 아니에요. 절제 속의 솔직함, 그게 배우의 품격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거짓이 없는 연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무대에서 진심이 아니면 관객이 다 알아요. 진짜로 느끼면, 공감은 저절로 생겨요."

도라를 통해 그는 '어른의 책임'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아이들은 거울 같아요. 어른이 잘못 살면 그 그림자가 고스란히 아이한테 가요. 아이들이 행복하려면 어른이 먼저 잘 살아야 해요." 도라는 어쩌면 그런 어른의 이야기다. "비겁한 어른이 되면 안 되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그게 어른의 사랑이에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덧붙였다. "누군가를 절실히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그 사랑을 외롭게 기다리거나, 떠나보낸 적이 있나요? 결국 우리는 다 그 동그라미 안을 돌고 있어요. 다만 그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그는 이번 공연에 참여한 이유를 '지켜온 힘에 대한 응원'이라고 말했다. "한 작품이 한 극단에서 50년을 이어간다는 건 기적이에요. 그런 역사에 참여한다는 게 감사하죠. 요즘은 극단이 버티기 어려운 시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무대를 만들어온 선배들에게 존경심이 커요." 그는 전통이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지켜온 사람들의 땀과 믿음이 이 작품의 생명력"이라고 말했다. "좋은 환경이 생겨나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오래 버틴다는 건 또 다른 가치예요. 그래서 이번 무대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배우로서의 바람을 묻자 송희정은 웃으며 말했다. "보고 또 보고 싶은 배우, 같이 하고 싶은 배우로 남고 싶어요. 요즘은 유쾌한 코미디도 다시 해보고 싶어요. 너무 무거운 작품들을 많이 했거든요.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아요." 그는 무대를 '살아있음을 느끼는 공간'이라 정의했다. "극장은 관객과 소통하는 곳이에요. 사랑받고 인정받는 자리죠. 극장에 들어서는 발걸음에 책임을 느껴요. 그래서 감사해요. 무대는 제가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막이 오르고, 침묵이 장면의 살결을 바꾼다. 도라는 기도의 자세로 서서 저마다의 상처를 마주하는 관객을 향해 천천히 시선을 들이민다. 배우의 몸은 악기처럼 울리고, 관객의 숨은 반응처럼 돌아온다. 서로의 온도가 맞춰지는 시간, 그 교감이 연극을 연극이게 한다. "극장을 들어서는 시간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송희정의 마지막 말은 무대 위의 기도처럼 잔잔하게 남았다.

연극 '에쿠우스' 50주년 기념공연은 서울 예그린씨어터에서 진행된다. 공연은 2026년 2월 1일까지 이어지며, 극단 실험극장이 제작을 맡았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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