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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쩔 수가 없다’,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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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23. 10:49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다짜고짜 시작하는 그런 영화가 있다. 천천히 막을 올리듯, 워밍업하면서 오프닝을 여는 게 아닌, 말하자면 빈 무대에 느닷없이 강한 조명을 때리는 방식이다. 어두운 극장 안, 돌발적인 눈부신 화면은 관객을 흠칫 놀라게 한다. 이런 영화들의 설정은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좀비 영화가 그렇고, 재난영화가 그렇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실직에 관한 영화다. 한 가장이 직장을 잃는다는 것은 가족에겐 재앙에 가깝다. 대출이라도 있으면, 집을 내놓아야 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이 작품 역시 예의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날카로운 태양 빛으로 시작된다.

천천히 틸 다운되는 카메라에 담긴 주인공의 표정은 밝다. 그의 뒤로 축복같이 내리는 백일홍 나무(배롱나무) 꽃잎은 가을을 재촉한다. 어려서 팔려버린 아버지의 집을 다시 매입한, 유만수(이병헌)는, 비집고 들어갈 어떤 틈새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이, 가족을 꼭 끌어안고 '모든 것을 이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는 것은 구조조정의 여파로 날아든 해고통지서다. 축복하듯 내리던 꽃잎의 상징은, 화려했던 백일 간의 만개를 마감하고 떨어지는, 실직에 대한 은유로 바뀌게 된다. 바닥에 추락하여 나뒹구는 낙엽에도 무력하게 휘둘리듯, 이제 만연한 가을, 그와 그 가족을 기다리는 혹독한 겨울이 목전에 닥친다.

어쩔수가없다엔 유독 두드러지게 나무의 이미지가 플롯에 배치돼 있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공장을 배경으로 하니 서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제지 전문가인 주인공의 취미는 분재다. 그의 손에 따라 거목은 얇은 종이가 되기도 하고, 작고 어린나무는 천년 고령의 모습을 한 고목으로 탈바꿈한다.

안팎으로 통제자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춘 그에게 실직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이제 적(敵)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피한 'AI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아니라, 소타자로서 그와 동일시되는 경쟁자들이다. 자신보다 더 뛰어나거나 또는 대등한 이들만 제거하면 남아있는 한 자리는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만수의 선택지는 연쇄살인범이 되는 것. 그런데 자신의 과거에서 미래로 대위 되는 세 명의 희생자 중, 현재 자기와 가장 닮은 고시조(차승원)만이 만수의 집에 묻힌다.

한편, 주인공 집에 묻힌 것은 피해자 시조 말고도 그의 의붓아들이 훔친 핸드폰도 있다. 파묻힌 시체와 전화기의 메타포는 분명해 보인다. 이로써 애써 진실을 외면하고 비리에 눈감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풍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에 심은 것은 희망을 상징하는 사과나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뿌리부터 썩어 벌레가 뒤끓고 마침내 고사할 것이다.

인문학적으로 나무와 뿌리의 모티브는 각각 수목모델과 리좀모델로 함의된다. 전자가 중심주의 모델이라면 후자는 대안으로 제시된 탈 중심주의 모델이다.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가지를 뻗는 위계의 수직구조와는 달리 뿌리는 수평적 네트워크로 엉켜 있는 연대의 구조를 이룬다. 하지만 극 중 사과나무는 잔뿌리 없이 흙으로 덮여, 덩어리져있다. 그 아래 리좀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으로 상징되는, 꽁꽁 묶인 은폐된 시신과 핸드폰으로 대위 되는, 진실은 썩어 문드러져 나무 자체가 생존할 수 없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연대조차 허락하지 않을 듯이 끌어안고 있는 만수 가족만이 살아남더라도, 그들은 기어이 기댈 터전조차 상실하게 될 것이다.

나무줄기의 소명은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이다.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을 때, 줄기 기둥은 대타자의 기표로서 팔루스(Phallus)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기표와 기의가 미끄러진 대타자의 질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지체 없이 거세해 버린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벌목의 이미지에 대한 해독을 자칫 환경주의적인 관점에서 교훈을 주고 있다고 오인하면 곤란한 이유다.

감독이 고민했다는 또 다른 제목 '가을에 할 일'은 겨울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일이다. 막연한 낙관론을 믿고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마음으로 희망을 품는 것은 헛되고 헛된 짓이다. 영화 '돈 룩 업'의 경고처럼 소행성이 다가와도 충돌 직전까지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고, 어떻게 되겠지, 하고 무턱대고 다가올 그날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하는 짓이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쩔수가없다의 주인공 만수가 태양을 쳐다보지 못하고 그늘을 찾는 이유가 바로 위와 같은 어리석음에 대한 은유다. 우리가 희망을 담아야 할 것은 사과나무가 아니라, 어린아이들이다. 영화에서 자폐가 있는 주인공 부부의 딸 리원이 '자신이 그린 독창적인 악보'를 보면서 첼로 연주하는 마랭 마레의 '농담'이 지시하는 지점은 우리가 무엇을 반복해야 하는가를 가리킨다. 홀로 살아남아 '공장 리모콘'을 잡는 만수와 같이 재영토화되는 우(愚)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리원이처럼 줄기를 탈주해 생성의 차이를 반복할 것인가.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에 이어서, 또 한편의 농담 같은 지독한 사회 풍자극을 만들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무엇인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어찌할 것인가. 후자라고 믿고 싶다. 쌀쌀한 늦가을이지만 아직 우리에겐 겨울을 준비할 시간이 조금은 남아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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