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1 | 0 | | 전남도립미술관 '바람 빛 물결' 전시 전경. 고화흠·양계남·윤재우·천경자의 자연 주제 기증작품이 한 공간에 소개되고 있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
전남도립미술관이 선보이는 전시 '바람 빛 물결'은 지역 문화 자산의 축적이 어떻게 예술의 흐름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조용한 기록이자, 기증 문화가 미술관의 정체성을 어떻게 단단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2021년 개관 이후 미술관에 기증된 작품은 총 158점으로 전체 소장품의 약 28 퍼센트에 해당한다. 그중에서도 지역 출신 작가들의 작품 120여 점은 남도 미술의 계보를 엮어내는 핵심적 축이며, 이번 전시는 바로 그 가치의 한 단면을 자연이라는 키워드로 펼쳐 보인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먼저 느껴지는 것은 작품 전체를 감도는 공기의 질감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시대마다 달랐지만, 예술가들은 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자신만의 언어를 길어 올렸다. 바람은 화면 위에서 선의 방향이 되고, 빛은 색채의 농담이 되며, 물결은 작가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의 흔적처럼 남는다.
이번 전시는 미술관 기증 소장품 가운데 자연을 주제로 한 대표작들을 선별해, 풍경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어떻게 내적 감정의 기록으로 확장되는지를 보여준다. 화면 속 풍경은 실제 장면의 모사가 아니라, 각 작가가 살아온 시간과 감정이 응축된 또 하나의 풍경이다. 자연을 향한 태도, 색채의 결, 화면을 이루는 리듬은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는 오히려 미술관 기증 컬렉션이 지닌 폭과 깊이를 한층 분명하게 드러낸다.
전시는 네 명의 작가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고화흠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전주사범학교와 일본 동경 녹음사화학교 회화과를 거친 뒤 원광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한 인물이다. 한국적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작업 세계를 펼쳐온 그는 젊은 시절 남도의 산수와 농촌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출발했다. 시간이 흐르자 자연의 형태나 사물을 감각적으로 해석하는 단계를 지나, 화면을 서정적 추상의 세계로 확장해 나갔다. 그의 풍경은 실재의 자연보다 자연이 건네는 감흥과 온도에 가까우며, 이러한 전환의 과정은 남도 화단에서 고화흠이 차지하는 위치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 02 | 0 | | 고화흠 '백안'. 1990년대. 캔버스에 유화물감. 98×146cm. 전남도립미술관 |
|
양계남은 남도 화맥을 대표하는 작은 고리이자 동시에 새 길을 연 존재다.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의재 허백련 문하에서 사사하며 남종화의 정신과 기풍을 깊게 체득했다. 남종화 2세대 작가로 분류되는 그는 전통적 미감을 토대로 하면서도 표현 영역을 스스로 확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세필을 이용한 치밀한 운용, 계절의 변화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색채의 겹, 사의주의의 정신을 현대적 감각과 결합한 실험들이 양계남의 세계를 규정한다. 그의 화면은 남도의 자연을 기록하는 동시에 자연을 통해 마음의 결을 드러내는 독자적 풍경이 된다.
 | 03 | 0 | | 양계남 '넉넉한 겨울'. 한지에 채색. 94×58cm. 전남도립미술관 |
|
윤재우는 강진 출신으로 해남 윤씨 가문에 뿌리를 둔 인물이며, 조선 후기 문인 윤선도의 13대 종손이라는 배경 또한 그의 예술관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축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유학해 서양화를 공부한 그는 이후 목포 문태중학교와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에서 교육자로 활동하며 지역 미술 교육의 토대를 다졌다. 그의 작품 세계는 사실적이고 목가적인 초기 양식에서 출발해, 점차 색채의 자유와 구성의 평면화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뻗어 갔다. 높은 채도의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방식, 형태를 단순화하거나 변형해 화면의 리듬을 드러내는 구성은 윤재우가 남도 서양화의 흐름에서 어떤 개성과 위치를 지니는지 보여준다.
 | 04 | 0 | | 윤재우 '추경'.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화물감. 50.5×62cm. 전남도립미술관 |
|
천경자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채색화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한 작가다. 전통 채색화의 형식적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색과 조형 언어를 구축하려 했던 그는, 자연의 형태를 상징화하거나 과감하게 생략하는 방식으로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가볍게 넘나들었다. 색채를 통해 자연의 감정선을 끌어올리는 듯한 화면 구성은 특유의 강렬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지닌다. 그가 바라본 자연은 현실의 풍경이라기보다 기억과 경험이 겹겹이 쌓여 빛을 품은 이미지에 가깝다.
 | 05 | 0 | | 천경자 '화혼'. 1973년. 종이에 채색(석채, 분채, 아교). 39×59.5cm. 전남도립미술관 |
|
'바람 빛 물결'은 이처럼 서로 다른 네 개의 시선이 만들어낸 풍경의 아카이브다. 자연을 향한 접근 방식은 달랐지만, 네 작가 모두 자연을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내면을 비추는 창으로 바라보았다. 관람객은 바람의 결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작가의 숨과 마주하고, 화면의 색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기억 속 어느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이번 전시는 기증자와 유족들이 남긴 귀한 작품이 지역 사회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미술관은 기증된 소장품을 전시와 연구의 기반으로 삼아 지역과 예술의 연결을 확장해왔다. 기증 품목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이를 지역 문화 발전의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다. 기증 문화가 더 활발해질수록 미술관은 지역의 기억과 예술의 미래를 동시에 품는 공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바람 빛 물결' 전시는 2026년 2월 9일까지 전남도립미술관 기증전시관에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깃든 예술가의 시간과 감정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전시장에 머무는 동안 관람객은 자연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리고 그 기록이 지역의 미술사를 어떻게 이어주는지 느끼게 된다. 풍경을 보는 일은 결국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가깝다. 바람과 빛과 물결이 남긴 흔적 위에서 관람객은 자신만의 풍경을 다시 그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