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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의 안보정론] 평화적 핵주권, 너무 오랫동안 지연된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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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30. 17:34

김태우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지난 10월 '지연된 기적'이 눈을 부시면서 꿈틀거렸다. 긴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려는 걸까? 지난 10월 29일 이재명-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 있었고, 백악관은 11월 13일 그 내용을 정리한 '공동 팩트시트(Joint Fact Sheet)'를 발표했다. 한국도 국문본을 공개했다. 내용 중에 "미국이 한국의 농축·재처리를 지지한다,"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했다" 등의 표현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70년 동안 미국이 금기어로 삼았던 표현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농축·재처리는 원자력 산업의 핵심 공정이어서 금지할 수는 없지만, 핵무기 생산 공정과 겹치기 때문에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의해 사찰을 받는다. 원자력 종사자들은 독자적으로 농축과 재처리를 하는 것을 '핵연료 주기의 완성'이라 부른다. 우라늄으로 핵연료를 생산하여 원전을 가동하고 폐연료봉을 재활용하거나 폐기하는 전 과정이 국내에서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외교관들은 군사적 뉘앙스를 피하고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필자는 안보전략가의 관점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핵잠재력' 또는 '평화적 핵주권'이라 불렀다. "동맹의 합의가 없는 핵무장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잠재력은 머금고 가야 한다"는 논리였다. 핵추진 잠수함도 그렇다. 농축·재처리를 할 수 있어야 건조에서부터 운용 및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자립할 수 있다. 결국 원자력 과학자, 외교관, 전략가 등은 직업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을 뿐 같은 능력을 갈구해 왔다.

만약 한국이 농축·재처리를 하고 국산 핵연료로 원전을 돌리고 국산 핵잠에 국산 연료를 사용한다면, 이는 '오랫동안 지연된 기적'이 실현됨을 의미한다. 원자력 종사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원자력 선진국이 되었다며 손뼉을 칠 것이고, 외교관들은 일본처럼 떳떳하게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극대화할 수 있다며 반색할 것이며, 해군은 잠수함 강국을 향한 첫걸음이라며 환영할 것이다. 필자는 '40년 핵잠재력' 숙원을 풀었다며 기뻐할 것이다. '지연'된 기적인 이유도 자명하다. 한국의 원자력 산업이 너무나 오랫동안 두 핵심 공정이 빠진 상태로 지내왔기 때문이며, 한국이 너무나 오랫동안 최소한의 대북 핵지렛대도 없이 일방적인 핵비대칭 상태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의 핵무기 보유를 묵인했고 일본에도 1988년 '포괄적 동의(Comprehensive Consent)'를 통해 농축·재처리를 허용한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를 금지해 왔다. 물론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손해만 강요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대신 미국은 방위 공약과 핵우산 공약으로 한국을 보호했고, 한국은 동맹의 안보방패에 힘입어 70년 동안 평화를 구가하면서 경제 기적을 일궈냈다. 그래서 차제에 거듭 밝히지만, '평화적 핵주권론'은 반미 강경론이 아니다. 국제규범이 금지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잠재력을 의미할 뿐이며, 농축과 재처리를 하는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 것처럼 한국도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직 아니다. 이재명 정부에 와서 이제 겨우 눈을 부시면서 고개를 들었을 뿐, 벌떡 일어난 것은 아니다. 기적으로 무르익기까지 숱한 협의와 합의가 필요하다. 팩트시트는 공식 합의문이 아닌 데다, 한국의 농축·재처리를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123 합의와 미국의 법적 요구에 부응하여(consistent with the bilateral 123 agreement and subject to U.S. legal requirements)'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이는 한미 원자력협력협정을 준수해야 하고 미국의 관련법을 발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 협정 11조는 "한미 고위급위원회(High Level Commission)의 협의를 거치고 양국이 서면으로 합의하면(agree in writing) 한국이 20% 미만의 농축을 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핵잠과 관련해서도 "승인했다(has given approval)"라는 원칙만 있을 뿐, 핵연료 공급을 포함한 기타 사항들에 대해서는 "추후 긴밀하게 협의할 것(will work closely with the ROK)"으로 되어 있다.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에 진출한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핵연료는 미국이 제공하는 방식'을 거론했던 점을 감안하면, 미국이 원하는 방식은 한국의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가더라도 사업 장소, 인프라 구축, 최종 목표, 관련법 발동 또는 개정, 민원 처리, 핵잠 운용 노하우 공유, 전체 일정 등 확정해야 할 과제들이 많다. 요컨대 아직은 그 기적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정확하게 말한다면 기적으로 가는 문이 빼꼼히 열린 정도다.

그럼에도, '빼꼼히 열린 문'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첫걸음을 떼지 않고 천리길을 갈 수는 없다. 미국이 '농축·재처리 지지'와 '핵잠 승인'를 언급한 것 자체가 70여 년 동맹 역사에서 처음이며, 그런 의미에서, 2025년 말 한미 정상회담과 팩트시트는 '기적을 향한 위대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국민과 정부 그리고 산업계와 군(軍)은 하나가 되어 함께 이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원자력 선진국의 위상을 완성하는 길이자, 한국의 국가 자존심과 안보·외교가 요구하는 평화적 핵주권을 구현하는 길이다. 그것이 해군 강국을 넘어 해양 강국으로 가는 위대한 첫걸음이다.

김태우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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