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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종전체제 관리기구인 '평화위원회'의 의장을 도널드 트럼프로 명기한 이 문서의 마지막 조항은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정 국가 지도자를, 그것도 미국 대통령을 국제 평화체제의 최종 보증자로 확정한 것은 유례가 없는데 이 조항 속에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전략이 들어있다.
제안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영토 재편이다. 크림반도와 도네츠크·루한스크 등 핵심 지역은 사실상 러시아 영토로 인정되고, 일부 점령지는 비무장 완충지대로 전환되지만, 국제법적 지위는 러시아 쪽으로 기울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나토 영구 비가입을 헌법에 명기해야 하며, 병력도 60~80만 명 수준으로 제한된다. 서방군의 장기 주둔과 훈련 역시 금지된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주권적 선택권을 대폭 제약하며, 사실상 영토·안보·미래 전략을 포기하는 대신 전쟁을 멈추는 구조를 띤다. 패전국에 가해지는 조약의 형식을 닮았으며, 국제법이 금지하는 무력 점령의 인정이라는 선례를 남긴다. 반면 러시아는 점령 성과의 국제 승인, 제재 해제와 G8 복귀, 장기 경제 파트너십, 그리고 전쟁범죄 책임의 사면이라는 일련의 혜택을 얻는다. 푸틴에게는 군사적 비용 대비 정치적 이익이 최대화된 협상안이 된다.
28개 조항(현재 19개로 축소 조정)은 미국의 전략적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전쟁을 '관리 가능한 휴전'으로 전환하여 유럽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부담을 줄인다. 미국은 직접적인 개입 없이 '보증권자' 지위를 확보, 유럽 안보 구조의 중심을 워싱턴으로 다시 고정한다. 러시아를 글로벌 경제와 시스템 안으로 되돌려 중·러 결속을 약화시키려는 계산도 엿보인다.
결정적인 것은, 평화체제의 정점에 트럼프가 명기된다는 사실이다. 평화위원회 의장은 조정자 수준이 아니라, 협정 이행 감시·위반 판단·제재 발동 권한까지 쥔 자리다. 다시 말해 전쟁 종결의 공과 향후 유지·관리의 공이 전부 트럼프에게 귀속되도록 설계된 구조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효과를 넘어 노벨평화상 수상 구조와 직결된다. 전쟁을 끝낸 지도자에게 평화상이 돌아간다는 공식이 반복돼왔다. 그 조건이 협정문 속에 명문화된다는 점이 다르다.
평화위원회 의장을 트럼프로 명기한 조항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치적 효과를 노린다. △평화 성과의 독점화: 영토 재편, 제재 해제, 재건 자금 흐름이라는 핵심 의사결정에 트럼프가 서명해야 한다. 협정이 성공하면 그 업적은 자연스럽게 "트럼프"로 귀결된다. △트럼프의 국제적 정당성 확보: EU,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트럼프가 이끄는 평화위를 인정해야 하므로, 이는 사실상 국제사회가 트럼프를 '중재 지도자'로 승인하는 효과를 낳는다. △노벨평화상 심사위원회 설득 장치: 종전·휴전, 무력분쟁 종결, 전쟁범죄 사면, 국제감독 기구 창설 등은 모두 노벨위원회가 중시하는 항목이다. 이 협상안은 평화상 수상 요건들을 충족시키도록 설계돼 있다. 그래서 이번 구상은 '노벨평화상 전략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특사 위트코프가 모스크바에서 푸틴을 만나기 직전, 푸틴이 "유럽의 대우크라이나 지원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 의지 표명"이라고 강경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협상 테이블을 앞두고 주도권을 잡기 위한 압박 메시지이자, 우크라이나·유럽·미국 간 틈을 벌리려는 전략적 언어로 분석된다.
러·우 전쟁은 다음 조건이 충족될 때 종료될 가능성이 높다. △양측 모두 '결정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할 때: 러시아는 조기 승리를 놓쳤고, 우크라이나는 서방 지원 약화와 병력 소모로 공격 능력이 급감했다. 2025년 말은 양국이 '단기 결정전 불가' 현실을 공식 인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트럼프의 협상 드라이브: 트럼프는 전통적으로 "딜 정치"를 강조해 왔으며, 노벨평화상이라는 '정치적 유산'을 확보하기 위해 종전 합의를 강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다. △유럽 내부의 여론 변화: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재정 부담이 증폭되며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러시아의 목적 달성 여부: 러시아는 이미 최소 목표(크림+돈바스 우세권)를 사실상 확보했다. 여기서 협상을 통해 국제적 승인을 얻을 수 있다면, 푸틴에게도 종전은 정치적으로 매력적인 결과물이다.
종합하면, 현실적으로 2025년 말~26년 초 사이가 유력한 종전 협상 타이밍으로 예상된다. 협정 체결과 수용 여부는 우크라이나와 미국·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에 달려 있지만, 구조적 흐름은 이미 '전쟁 관리에서 협상 국면'으로 이동했다.
금번 안은 단순한 휴전 제안이 아니라, 영토 재편·안보 구조의 재설계·러시아의 국제 복귀·전쟁범죄 사면이라는 요소를 포괄한 지각 변동을 초래한다.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동유럽의 미래뿐 아니라 국제질서의 방향까지 결정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번 협상안은 트럼프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정치적 설계도라는 점이다.
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