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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이 다시 무대를 만나는 자리, 연극 ‘사막 위의 몽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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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2. 30. 08:00

예비 극작가 인큐베이팅 프로젝트 ‘희곡 읽기 좋은 날’의 첫 현장 발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묻는 디스토피아적 선택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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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사막 위의 몽구스' 연습 장면. / 사진 상상두목
희곡은 여전히 무대를 필요로 한다. 동시대 공연 환경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무대를 전제로 한 글쓰기의 가치는 그 변화 속에서도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연극 '사막 위의 몽구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현재로 불러오는 사례다. 한 편의 신작 발표이자, 예비 극작가를 둘러싼 창작 환경을 가시화하는 이 공연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 축적된 기록에 가깝다.

'사막 위의 몽구스'는 2025년 예비예술인 최초 발표 지원 사업 '희곡 읽기 좋은 날'의 최종 선정작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 프로젝트는 '좋은 텍스트에서 좋은 공연이 나온다'는 창작집단 상상두목의 신념을 토대로, 희곡의 역할과 위치를 다시 붙잡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했다. 문학적 순수성만을 고집하기 어려운 시대적 요구 속에서도, 희곡이 지닌 언어적 밀도와 사유의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이 이 사업의 중심에 놓여 있다. 변화하는 무대 조건을 인정하되, 텍스트의 가치를 뒤로 미루지 않겠다는 태도다.

'희곡 읽기 좋은 날'은 전국 6개 지역에서 선발된 30명의 예비 극작가를 대상으로 12주간 인큐베이팅을 진행한 프로젝트다. 활동비 지급과 강의, 낭독회, 프로팀 협업을 병행하며, 각자의 언어적 개성을 하나의 희곡으로 완성하도록 돕는 구조다. 최종적으로 우수 희곡에는 실제 무대화의 기회가 제공된다. 이 무대화는 선정의 결과이자 최초 발표의 성격을 띠지만, 모든 과정을 마무리하는 종착지라기보다는 현장으로 진입하기 위한 첫 문에 가깝다.

이 프로젝트를 주최하고 주관한 창작집단 상상두목은 2012년 설립 이후 텍스트 중심의 연극을 꾸준히 탐구해온 단체다. 상상두목은 희곡을 출발점으로 관객과 호흡하며 작품을 다듬는 과정을 중시해왔고, 정극을 기반으로 하되 다른 공연 예술 장르와의 융복합을 통해 독창적인 형식 실험을 이어왔다. '이상한 나라의, 사라',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슬픔', '다른 여름' 등으로 이어진 레퍼토리는 사회적 현실과 윤리적 질문을 희곡이라는 언어로 밀도 있게 다뤄온 궤적을 보여준다. 이번 프로젝트는 그러한 창작 철학이 신진 작가 발굴과 양성이라는 방향으로 확장된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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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사막 위의 몽구스' 연습 장면. / 사진 상상두목
'사막 위의 몽구스'는 이 인큐베이팅 구조의 결실이다. 작품은 이상기후로 토지가 사막화되고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100년 뒤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갈등을 거듭한 인류는 국제기구 NEXT OASIS, 약칭 넥시스를 설립해 물 배급을 통제한다. 넥시스 소속 관리자인 몽구스는 D6 구역을 담당하며 교대 근무 중 모래언덕에서 인기척을 감지하고, 그 정체가 물소임을 알게 된다. 몽구스는 물소를 구호소로 돌려보내려 하지만, 물소는 몽구스를 기절시키고 포박한다. 이후 두 인물의 대화가 이어지고, 동료까지 얽히는 상황 속에서 몽구스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곤란한 상황에 놓인다.

이 작품에서 디스토피아적 설정은 단순한 세계관 설명을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물 배급과 관리 체계는 질서와 생존,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며, 몽구스라는 인물을 선택의 압박 속으로 밀어넣는다. 작품의 긴장은 사건의 크기보다 판단의 근거가 흔들리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제도와 규칙, 동료와 조직,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존재 사이에서 몽구스는 어떤 사실을 믿어야 할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게 된다.

작품 의도는 '옳다'와 '그르다'라는 익숙한 언어에서 출발한다. 오른손과 왼손이라는 표현처럼, 우리는 너무 쉽게 어떤 기준을 학습해왔다. 그러나 그 기준은 정말 본질적인 판단일까. 아니면 우리가 발을 딛고 숨 쉬는 환경이 그렇게 믿게 만든 것일까. 작품은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는 옳고 그름에 대해, 지금 당장 선택해야만 하는 인물을 무대 위에 세운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혼란과 괴로움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며,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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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사막 위의 몽구스' 연습 장면. / 사진 상상두목
이 질문은 창작진의 이력과도 맞닿아 있다. '사막 위의 몽구스'는 최화영 작가의 첫 무대화 작품이자, 임지성 연출의 첫 연출작이다. 최화영은 경기 군포 지역의 예비예술인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희곡을 무대 위에 올린다. 임지성 연출은 창작집단 상상두목에서 10년 이상 활동해온 배우 출신 연극인으로, 여러 공연을 통해 쌓아온 신뢰와 경험을 바탕으로 연출에 첫발을 내딛는다. 이 작품은 개인의 '첫 이력'을 강조하기보다, 프로젝트가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무대화의 기회를 제공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최치언은 이 프로젝트를 예비 극작가들의 지속가능한 예술 활동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한 시도로 설명한다. 전국 6개 지역에서 선발된 30명의 예비 극작가가 한 편씩 희곡을 완성한 이번 과정은 결과만을 남기기보다, '예비'라는 경계에 선 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태도를 드러낸다. 운영 주체에게도 초심을 환기하는 설렘이 중요하다는 그의 발언은, 이 사업이 성과 중심의 제도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

작가의 말 역시 작품의 정서를 또렷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그 선택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그러나 때로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당신의 선택이 지금의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를 바란다는 말은, 작품이 관객에게 요구하는 태도를 정리한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재판이 아니라, 선택의 조건과 맥락을 함께 바라보는 시선이다.

연극 '사막 위의 몽구스'는 2025년 12월 30일과 31일, 극장 봄에서 총 3회 공연된다. 이 무대는 성과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질문을 함께 건네는 자리다. 희곡을 읽고 쓰는 환경과 '예비'라는 이름 아래 놓인 창작자들의 현재,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온 옳음의 기준이 한 공간에서 교차한다. '사막 위의 몽구스'는 이 만남이 지금의 연극 현장에 왜 필요한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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