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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한 시절의 꿈을 저미듯 기억하는 ‘레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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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1. 25. 18:10

<19> 일본 분고타카다 '쇼와노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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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고타카다 쇼와노마치 '복고풍' 1950년대 상점가 입구.
레트로(Retro). '복고(復古)'로 번역되어 쓰인다. 한자 그대로 풀면, '오래된 것을 되돌리다'라는 뜻이다. 회상, 추억이라는 뜻의 영어 'Retrospect'의 준말로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과거를 그리워하여 본뜨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단순히 옛것에 대한 향수 때문에 과거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대적 감성에 맞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인데, 현대 문명에서 느껴지는 속도감의 불안 대신 친숙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레트로' 박물관 속으로 곧장 걸어가 볼 참이다.

시간이 멈춘 마을, 일본 오이타현 분고타카다(豊後高田). 에도시대부터 쇼와 30년대까지 구니사키 반도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었지만 이젠 오래된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1950년대 일본의 한 지방 도시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의 쇼와노마치(昭和の町)가 '옛 정취가 그리울 때 꼭 한 번 가봐야 할 마을'로 꼽히는 까닭은 쇼와시대(1926~1989) 당시의 활기가 살아 있는 따뜻하고 정겨운 마을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후쿠오카에서 JR닛포혼센(JR日豊本線)으로 2시간 남짓, 마을 어귀 낡은 버스 터미널과 조그만 대합실, 흑백 사진 속 빛바랜 추억으로 남은 건물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쇠락만 거듭하던 이 마을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실제로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로 꼽힐 만큼 미래가 어두웠던 이 마을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마을의 회생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빛바랜 마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로 하고, '일부러 낡아 보이게' 수리할 필요도 없이 1950년대 느낌을 재연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도심재생의 첫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9개 상점으로 출발했지만, 이후 40개 이상의 상점이 동참하면서 550m 길이의 복고풍 거리가 완성되었다. 여기에서는 도시재생을 오직 '리모델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동안 우리가 많이 보고 엄청 실망했던, 추억을 어설프게 강요하는 우리 지역의 볼거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마을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거리에서 단연 압권은 '쇼와로만구라'와 '다가시야노 유메박물관'이다.

쇼와노마치의 캐릭터 조형물
쇼와노마치의 캐릭터 조형물.
'쇼와로만구라'는 1900년대 초에 세워진 쌀창고를 리노베이션한 박물관으로, 1900년대 초부터 1950년대까지의 생활상이 재현되어 있어 그 시절 일본을 찾아온 것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다. 20세기 초 노무라 가문이 세운 창고 건물을 6000만엔을 들여 수리한 후 1950~1960년대 생활용품 및 완구 등을 모아 놓은 이곳엔 당시의 갖가지 장난감에서부터 민가와 상점, 교실이 재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오이타현의 특산품을 맘껏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슌사이(旬彩)'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자리 잡고 있다.

'다가시야노 유메박물관'도 추억 살리기에 단단히 한몫을 한다. 불량과자를 일본말로 '다가시'라고 부르는데, 유해식품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추억을 되살리는 아주 멋진 장치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후쿠오카 출신 수집가 고미야 씨가 평생을 모은 30만 점의 수집품 중 약 6만점이 전시되어 있다.

'레트로+아날로그'만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기란 쉽지 않다. 마을의 역사성과 주민들의 의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고, 그걸 증명하듯 진심이 담긴 큰 패널이 눈에 들어왔다. '쇼와노마치 인물도감'. 함께 시작한 40명의 가게주인들이 기증한 생활소품들과 밝은 얼굴로 마을과 가게에 대한 애정을 한마디씩 표현한 것을 모아둔 전시물이다. '옛 맛의 가치를 지키는 우리집', '정겨운 거리에서 문득 발길을 멈추고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얘기하는 가게'. 이 마을 프로젝트가 성공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원작에 비해 아쉬웠다는 평을 듣긴 했지만, 한국에서도 스테디셀러가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이곳을 배경으로 영화화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쇼와로망구라’ 본네트 버스
'쇼와로망구라' 본네트 버스를 보는 관광객.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책임지는 잡화점의 변화를 완벽하게 표현하기 위해 제작진은 실제 세트를 지었고,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주무대인 쇼와노마치 외에도 오자키 해안, 마타마 해안, 분고타카다 중앙병원 등에서 촬영했다. 세트가 보존되면서, 절망 속 빛난 희망을 만나는 이야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작품 속의 기적이 이 마을에도 찾아온 것이다.

쇼와노마치에서는 각 점포마다 자기 가게의 역사를 알려 주는 보물을 하나씩 전시해 두는'한 점포 한 상품'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고풍스러운 간판이 나란히 늘어선 거리를 산책하고 있으면 쇼와시대로의 시간여행을 실감하게 된다. 주말에는 '본네트 버스'라고 하는 그 시절 일본 전역을 달리던 레트로 버스를 무료로 탈 수 있다.

5G에도 조급해하는 시대가 되면서,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낡은 필름 카메라와 빛바랜 LP음반을 찾는 사람들. 이 무슨 번거롭고 고집스러운 일인가 싶지만 누군가에겐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자, 낭만 그 자체일 것이다. 디지털에 둘러싸여 오히려 낯설어진, 그래서 다시 새로워진 게 바로 아날로그다. 어떤 것을 '레트로'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방일까, 재창조일까.

일본인들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 믿고 따랐던 극과 극의 시대, 쇼와, 그 우아한 노스탤지어는 올해 이곳 '쇼와노마치'의 특별한 희망이다. 올해는 1926년 히로히토 쇼와(裕仁昭和) 원년 이래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망각이 화두가 된 디지털시대에 역사가 존재하는 까닭은 미래를 만들 지혜를 통찰하기 위함이 아닐까. 오늘, 분고타카다 이야기를 전하면서, 가벼운 추억의 이름으로도, 그리 아프지 않은 역사의 이름으로도 벅찬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작은 기적을 보여주고 싶었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마을사람 40명을 소개한 ‘인물도감’
뜻을 같이한 마을사람 40명을 소개한 '인물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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