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메콩강 건너 도착한 광주의 기억… 한강 ‘소년이 온다’ 라오어로 옮긴 정상현씨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60309010002137

글자크기

닫기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승인 : 2026. 03. 09. 10:48

한강 '소년이 온다', 한국 소설 최초·노벨문학상 수상작 최초로 라오어 정식 단행본 번역 출간
23년 차 라오스 교민 정상현씨, 자비로 출간
76c50e7c-ef82-4c3f-8774-78d6da7279c4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라오스어로 번역한 라오스어 통번역가 정상현씨/본인 제공
한강의 이름이 스웨덴 한림원에서 호명된 것은 2024년 10월이었다.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됐던 그의 주요 작품은 전 세계 서점에서 다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물결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 있었다. 메콩강 너머, 라오스였다.

수도 비엔티안의 시내 서점이 일곱 군데. 2020년 기준 중앙 단위 출판사 수 7개, 연간 출판 권종 225종. 한국 문학은커녕 아시아 문학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정상현씨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라오어로 옮겼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봉사단원으로 처음 라오스에 발을 디딘 후 23년째 라오스에 살고 있는 정상현씨는 프리랜서 통번역가로 일하면서 라오스 국립대학교 대학원에서 라오문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라오스 작가 수완턴 붑파누웡의 『제2대대』에 나타난 '양심'을 비교한 논문으로 학위 심사를 통과했다.

논문을 쓰려면 어차피 소설 인용 부분을 라오어로 번역해야 했다. 지도교수가 말했다. "아예 전문을 번역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그렇게 시작된 번역이 한강 작가의 소설로는 물론, 한국 소설로도 최초의 라오어 정식 완역본이 되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 라오어로 직접 번역된 것도 처음이다.

-한강 작가의 여러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를 고른 이유가 있나요
"안나-카린 팜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 위원이 인터뷰에서 한강 작품의 입문작으로 『소년이 온다』를 가장 먼저 추천한다고 한 적이 있어요. 논문의 주제인 '양심'의 발현 양상을 짚어내기에 가장 적절한 작품이라고도 생각했고요."

-논문에서 『소년이 온다』와 라오스 작가 수완턴 붑파누웡의 『제2대대』를 '양심'이라는 키워드로 비교하셨죠. 서로 다른 역사적 폭력을 다루는 두 작품이 만나는 지점은 어디였습니까?
"『제2대대』의 인물들은 서로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며 전쟁 이후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구원을 얻어요.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은 타인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침묵을 직시하고, 그 침묵을 말로 바꾸는 증언의 행위를 통해 인간성을 되찾으려 하죠.

논문에서는 이걸 각각 '히리-옷땁빠 윤리'와 '증언의 윤리'로 표현했어요. '히리-옷땁빠'는 악행에 대한 내면의 수치심, 그리고 악행의 결과가 초래할 업에 대한 두려움을 뜻하는 불교 개념인데요. 히리-옷땁빠 윤리는 공동체의 양심이 개인의 양심을 이끄는 구조이고, 증언의 윤리는 개인의 양심이 공동체의 가능성을 다시 여는 구조예요. 하지만 그 끝에서 도달하는 종착점은 같아요. 두 작품 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양심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죠."

수완턴 붑파누웡은 1960~70년대 라오스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로 동남아시아문학상(SEA Write Award)을 수상한 라오스의 대표 작가다. 광주와 라오스 내전. 시공간이 전혀 다른 두 폭력의 현장을 정씨는 '양심'이란 언어로 함께 읽어낸 것이다.

-라오스 독자에게 이 책은 '한국의 비극'으로 읽힐까요, 아니면 자기 역사와 겹쳐지는 이야기로 읽힐까요? 라오스 현대사에도 국가 폭력의 기억이 있을 텐데요.
"아무래도 객관적인 '한국의 비극'으로 읽힐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정부에 항거한 내용을 출판해도 되는 걸까' 하고 여쭈었을 때, 팔순의 편집자께서 '뭐 어때, 라오스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 이야기니 상관없어' 하시더라고요. 라오스에서도 국가적 폭력은 존재할지언정 일반 국민은 알기 어려운 상황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죠. 사회주의 정권을 피해 프랑스나 미국으로 망명한 라오 사람들이 바깥에서 목소리를 내더라도, 그게 라오스 내부로는 와닿지 않아요. 정치적인 견해를 밝히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인식이 기본으로 깔린 사회가 되었달까요.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도 영웅담과 체제 옹호적인 주인공의 성장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요."

침묵이 일상인 사회에서, 침묵을 증언으로 바꾸는 이야기를 출판한다는 것. '한국 이야기니 상관없어'라는 편집자의 말이 오히려 라오스의 침묵의 깊이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번역 과정에서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문장이 궁금합니다.
"'그 새벽 캄캄한 도청 계단을 따라 글자 그대로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던 피가 떠오를 때마다 생각합니다. 그건 그들만의 죽음이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들을 대신한 거였다고, 수천곱절의 죽음, 수천곱절의 피였다고.'란 문장을 라오어로 옮기면서 몇 가지 문제에 부딪혔어요. 라오어는 목적어를 동반한 동사를 한국어처럼 도치해서 쓰기 어려워요. 그래서 목적어구를 짧게 먼저 두고, 다음 문장에서 보충 설명을 붙이는 식으로 구조를 다시 짰어요. 대신 쉼표와 띄어쓰기를 최대한 활용해 한국어 원문의 호흡을 살리려고 했죠. 또 '캄캄한'의 반복감에 맞춰 라오어에서도 반복형을 살렸고, '콸콸'에 해당하는 의성어가 없어 '폭포처럼'이라는 표현으로 감각을 우회해 옮겼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화자가 계속 바뀌고 죽은 자의 목소리까지 등장하죠. 이런 다성적 구조는 어떻게 살렸나요?
"다행히 한강 작가가 뚜렷하게 다른 어투로 화자를 구분해 주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일이었어요. 예를 들어 '다음의 일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에서, 한국어는 동사 변화를 통해 존대말을 표시할 수 있지만 라오어에서는 그런 표현이 어렵거든요. 주어를 생략하면, 고맥락 언어인 한국어와는 달리 행위자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주어를 살려 쓰면서, 존대말에 사용하는 주어를 선택해서 문체의 높임을 보존했어요.
6장에 등장하는 동호 어머니의 진한 남도 사투리는 고민이 많았어요. 라오스의 해방구였던 북동부 쌈느아 사투리를 가져다 쓸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여러 분들의 조언을 받아서 그냥 표준어로 쓰되 중·노년 여성이 쓸 법한 어투로 번역했어요. 편집자 선생님이 팔순의 여성분이시라 꽤 자연스럽게 윤문이 된 것 같습니다."

언어가 유사하고 매스미디어가 발달한 태국을 메콩강 건너에 두고 있는 라오스의 독자들의 상당수는 그동안 세계문학을 태국어 번역본을 통해 접해왔다. 막심 고리키 같은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 러시아어에서 라오어로 번역된 적이 있고,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도 소개된 것이 몇 있지만, 그 밖의 세계문학은 대부분 태국어 번역본을 거쳐 읽히는 구조다. 자기 언어로 직접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확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년이 온다' 역시 이미 태국어판이 나와 있지만 정상현 씨는 "광주의 기억이 라오스의 고유한 언어로 직접 읽혀야 한다"고 판단했다.

-태국어 경유가 아니라 한국어에서 라오어로의 직역이라는 점이 실제 독자들의 독서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태국어에는 구두점과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강의 시적인 문장들을 태국어로 옮기면 그 짧게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호흡을 살리기가 어렵죠. 반면 라오어는 구두점을 거의 한국어와 비슷한 수준으로 쓸 수 있고, 띄어쓰기도 꽤 융통성이 있어서 형태적으로 한국어 원문에 가깝게 만들 수 있어요. 라오어 독자들이 원문의 느낌에 좀 더 가깝게 읽을 수 있는 거죠.
그리고 태국어와 라오어에 공통으로 있는 단어라 하더라도 뉘앙스가 살짝 달라요. 예를 들어 '팬'이라는 단어는 태국어로 연인이나 배우자를 뜻하는데, 라오어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의 연인을 뜻할 때가 많죠. 라오어 직역을 읽으면 이런 혼동도 덜 하게 될 테고요."

638847026_1404160595055001_5818065595093239881_n-2
한국 소설로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으로서도 처음으로 라오스어로 완역돼 출판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라오어본/정상현씨 제공
- 표지를 직접 디자인하셨다고요. 인도보리수 잎 165장이 앞뒤 표지를 채우고 있는데, 라오스 독자가 이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느끼길 바란 감정은 무엇이었습니까?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임을 느끼길 바랐어요. 불교적 색채가 강한 라오스에서 인도보리수는 생명을 상징하거든요. 부처가 그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잖아요. 큰 잎 안에 심장처럼 보이는 작은 잎이 들어 있고, 잎 가장자리로 붉은 피가 흘러내려요. 뒷면에는 공동묘지의 비석처럼 빼곡하게 나뭇잎이 들어차 있고요. 165장입니다. 5·18 당시 희생된 165명의 사망자를 기리는 거예요.
태국어판을 이미 읽은 라오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한 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잎사귀의 잎맥이 가슴뼈 같아 보이기도 한다며, 가슴뼈를 그대로 드러낸 영어판이나 태국어판 표지보다 더 은유적이어서 좋다고요."

5·18의 숫자가 라오스의 종교적 상징 안에 심어졌다. 광주의 기억이 인도보리수의 잎맥을 타고 흐르는 형상. 죽은 자의 증언을 다시 증언한 한강의 소설을, 번역과 표지 디자인으로 한 번 더 증언한 셈이다.

-출판을 자비로 하셨다고요. 라오스에서 책을 낸다는 게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라오스의 출판사들은 대부분 영세해서 자체적으로 기획해서 책을 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작가나 번역가가 자비로 출판하는 게 대부분이죠.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사업에 응모하기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어쩔 수 없이 이 책도 번역자인 제가 자비로 출간했습니다. 500권은 팔아야 본전을 뽑을 텐데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예요.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요."

출판사 덕껫은 라오스에서 가장 명망 있는 출판사 중 하나다. 라오스 문학계의 거성 마하 실라 위라웡의 딸이자 동남아시아문학상 수상 작가인 두앙드안 분냐웡이 운영하고 있다. 가장 명망 있는 출판사에서 냈지만, 비용은 번역가 본인이 댔다. 라오스에서 문학이 존재하는 방식이 그런 것이다. 책을 쓰는 사람이 곧 책을 사는 사람이고, 문학 인구 전체가 한 줌인 나라에서 500권의 손익분기점은 아득하다.

-이 책을 내면서 마음에 그린 독자가 있었습니까? 누가 이 책을 펼칠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라오스에서 책을 읽는 인구는 정말 얼마 안 돼요. 문인협회에 소속된 작가들이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선생들, 그리고 취미로 책을 읽는 한 줌의 독서가들…. 그 몇 안 되는 문학 인구가 책을 직접 쓰고, 다른 이들이 낸 책을 사서 읽죠. 그 한 줌의 독서가들에게 좀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달까요."

-출간 후 현지 반응은 어떤가요?
"출간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책을 읽은 분들의 소감을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 라오어로 번역·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반겨 주시는 것 같아요. 비엔티안 시내 서점 일곱 군데 모두 기꺼이 책을 받아 주셨고요. 이번 주에는 라오국립대학교에서 북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거기서도 연사로 초청해 주셨어요. 모쪼록 책이 잘 팔려서 다음 번역 작업도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다음에 라오어로 소개하고 싶은 한국 문학은 무엇입니까? 반대로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은 라오스 작품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너무 무거운 주제를 첫 작품으로 했기 때문에 다음에는 좀 더 가볍고 재미있는 걸 번역해 보고 싶어요. 공상과학(SF)도 라오스에서 별로 소개된 적이 없는 장르라 재미있을 것 같고요.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같은 건 어떨까요?
라오스 작품 중에서는 우리가 '베트남 전쟁'으로 알고 있는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어요. 한국과 라오스는 전혀 무관한 나라일 거라고들 생각하시는데, 라오스에 대해 너무 알려진 게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라오스도 깊숙이 관여한 인도차이나 전쟁을 좀 파고들어 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두 나라 간에 접점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는 마지막으로 한 인물의 이름을 꺼냈다. 펫사랏 왕자. 왕가 출신이면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큰 공을 세운 라오스의 전설적 인물이다.

"펫사랏 왕자 전기도 흥미로워요. 프랑스 식민지 시기에 라오어도 베트남어처럼 고유의 문자를 잃고 라틴 문자를 쓸 위기에서, 라오 문자를 지켜낸 사람이에요. 그 덕분에 현재 라오스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공용 폰트의 이름도 '펫사랏'으로 지었다고 해요."

자기 문자를 지켜낸 왕자 덕분에 라오어는 살아남았고, 그 언어에 이제 광주의 기억이 새겨졌다. 500권의 본전을 걱정하면서도 다음 번역을 꿈꾸는 그에게서, 문학이 존재하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 한 줌의 독서가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물하겠다는 소박한 포부. 메콩강 건너에서 한강의 문장이 라오어의 호흡으로 다시 태어나는 동안, 광주는 조금 더 먼 곳까지 걸어갔다.
정리나 하노이 특파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