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0 |
| 김동영 중국경영연구소 부소장·동국대 겸임교수 |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금까지 40번 이상 직접 만남을 가졌다. 2026년 5월 20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 깔린 붉은 카펫 위로 두 정상이 나란히 걸어갈 때 중국 군악대는 러시아 고전 명곡 '모스크바의 밤'을 연주했다. 양국은 정상회담을 통해 세계 다극화와 새로운 국제관계 제창에 관한 공동 성명을 채택했고, 미국의 차세대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골든 돔' 구상이 국제 안보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비판했다. 또한 경제, 무역, 과학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총 40건의 협력 문서를 체결하며 결속을 다졌다. 하지만 이 화려한 외교 무대 이면에는 거시적 명분 뒤에 숨겨진 양국간 중요한 비즈니스 계산기가 작동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의 방향성을 기획하고 통제하는 설계자로서, 동맹이라는 외교적 수사에 흔들리지 않고 실익을 극대화하는 판을 짠다. 전 세계 에너지 시장이 예의주시했던 '시베리아의 힘-2(Power of Siberia-2)' 가스관 건설 프로젝트가 끝내 최종 서명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Dmitry Peskov) 크렘린궁 대변인은 해당 프로젝트 논의에 진전이 있었다고 발표했으나, 정작 열쇠를 쥔 중국은 서두를 것이 없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서방의 제재로 판로가 막힌 러시아로서는 이 파이프라인의 개통이 절실하지만, 중국은 특정 국가에 대한 화석연료 의존도를 조절하려는 기획 하에 장기적인 가스 공급 단가를 낮추기 위한 지렛대를 쥐고 속도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인도의 원유 구매량이 감소하면서 아시아 지역의 에너지 흐름이 중국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러시아는 국가 예산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시장으로 우랄산 원유(Urals crude) 공급을 집중하고 있다. 중국의 독립 정유 시설들이 이 저렴한 원유를 가파르게 흡수하면서, 2026년 2월 러시아의 대중국 원유 수출량은 하루 약 210만 배럴이라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무역업계는 중국으로 인도되는 우랄산 원유의 할인율이 최대 배럴당 15달러까지 확대 책정될 것으로 예상한다. 외부 제재가 만들어낸 시장의 진공 상태를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며, 자국 하드웨어 제조업의 비용을 근본적으로 낮출 수 있는 초저가 에너지 기저를 확보해 나가는 구조다.
나아가 중국은 헐값의 화석연료 조달을 넘어, 지정학적 에너지 위기 자체를 자국 신에너지 산업의 수출 모멘텀으로 뒤바꾸고 있다. 2026년 2월 말 이란(Iran)의 호르무즈 해협(Strait of Hormuz) 봉쇄 위기로 글로벌 원유 수송량의 31%가 차단되고 브렌트유가 배럴당 82달러를 돌파하며 글로벌 경제가 충격에 빠졌다. 이 시점에서 중국은 유가 폭등에 흔들리는 대신,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중국산 전기차와 친환경 인프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시장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다. 2026년 1월 기준 중국의 자동차 수출은 68.1만 대로 전년 동기 대비 44.9% 증가했으며, 이 중 신에너지 자동차(New Energy Vehicle) 수출이 30.2만 대로 100% 이상 폭증했다. 특히 순수 전기차 비중이 65%를 차지하며 영국, 벨기에, 아랍에미리트 등에서 점유율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모멘텀 속에서 중국 테크 기업들은 단순한 제품 수출을 의미하는 1.0 단계를 뛰어넘어, 현지 생산과 생태계 자체를 이식하는 출해(Outbound / 出海) 2.0 단계로 맹렬히 진격 중이다. 비야디(BYD)는 2026년 1분기 헝가리 세게드(Szeged) 공장에서 시험 생산을 시작하며 현지화의 닻을 올렸다. 상하이자동차(SAIC ) 역시 자사 브랜드를 앞세워 2025년 해외 신에너지차 판매 35만 대를 기록하며 거점을 다졌다. 전 세계 배터리 소재의 70%, 완제품의 60%를 통제하는 CATL과 신왕다(Sunwoda) 등은 해외 16개 생산기지를 구축하며 수직 계열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화웨이(Huawei) 같은 테크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12개 완성차 브랜드와 스마트 운전 솔루션 협력 체계를 구축하며 대체 불가능한 자신들만의 생태계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국가 차원의 치밀한 판 짜기와 저렴한 에너지 확보, 그리고 기업 단위의 맹렬한 생태계 장악이 결합된 이 거대한 메커니즘은 한국 제조업에 어려운 숙제를 던진다. 국제 표준의 에너지 비용을 온전히 감당하며 범용 중간재 수출에 기대어 온 한국의 기존 산업 모델로는, 기저 원가를 극단적으로 낮추고 생태계까지 장악해 들어가는 중국의 구조적 원가 경쟁력을 극복하기 어렵다. 이 칼럼을 통해 계속 강조했듯이 강대국 간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반사이익을 셈하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철저한 실리주의로 무장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 속에서 한국 기업이 살아남을 길은, 밸류체인의 핵심 길목에서 미·중·러 어느 진영도 자체 조달하기 어려운 고정밀 소재나 공정 제어 모듈과 같은 병목 기술을 선점하여 독점적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김동영 (중국경영연구소 부소장 / 동국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