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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국은 ‘문서’만으로 읽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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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6. 2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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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호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 부소장
지난 30년 가까이 워싱턴에서 한미 관계를 지켜보며 필자가 견지해 온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미국을 문서만으로 읽지 말라. 미국이 발표하는 공식 안보 문서를 통해 외교정책의 큰 방향을 가늠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이 실제 정책으로 직결되느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따라서 대통령과 외교·안보 핵심 인사들의 발언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며 문서와 현실의 간극을 확인해야 한다.

지난해 12월 백악관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이 좋은 사례다. 이 문서는 중동이 미국 외교정책을 지배하던 시대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중동은 더 이상 미국 외교정책의 발목을 잡거나 급박한 안보 위기로 몰아넣을 상시적 불안 요인이 아니라는 판단이었다. 그 주요 원인으로 역내 최대 불안정 요인이던 이란의 급속한 세력 약화가 꼽혔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 핵시설을 정밀 타격한 '미드나이트 해머(Operation Midnight Hammer)' 작전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가였다. 그러면서도 미국이 여전히 중동에서 관리해야 할 핵심 이익으로 에너지 공급 안정과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적인 개방 유지가 꼽혔다. 그러나 불과 반년 만에 이러한 판단은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험을 무릅쓰고 이란과 전쟁을 치렀고, 중동은 또다시 미국 외교정책의 최우선 현안으로 떠올랐다.

미국 외교정책을 이해할 때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원칙은 분석 단위를 '미국'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행정부'에 두는 것이다. 미국의 국가이익에는 일정한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우선순위와 전략, 정치적 계산은 행정부마다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미국 외교정책을 이해하려면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뿐 아니라 해당 행정부의 국내외 정치적 환경과 내부의 정치적 역학관계, 대통령의 정책 결정 방식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 체결한 종전 양해각서(MOU)가 좋은 사례다. 이 양해각서를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양해각서 제1조는 레바논의 영토 보전과 주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레바논에 대한 군사작전의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종료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양해각서 협상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됐다.

이스라엘은 강하게 반발했고 미국과의 관계도 급속히 냉각됐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J. D. 밴스 부통령을 전면에 내세워 이스라엘에 공개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유일한 우군은 미국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미국의 외교적 시간표와 전략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군사 지원도 재검토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워싱턴 조야에서조차 부통령이 동맹국을 향해 이처럼 공개적으로 압박성 발언을 내놓은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정책 결정 방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동맹 관리보다 자신의 정치적 판단과 국내 정치적 효과를 우선시하는 정치인이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이란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재개방해 국제유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놓친다면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고, 자신 역시 민주당의 탄핵 공세 속에 조기 레임덕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동맹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트럼프 외교에서 상수는 동맹이 아니라 대통령 자신의 정치적 생존이 된 것이다. 미국 외교정책을 읽을 때 또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외교정책이 행동만큼이나 담론과 수사로도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정책결정자들의 발언은 단편적인 문구가 아니라 그것이 나온 시점과 정책적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대통령의 SNS 게시물 하나가 고위 당국자의 발언을 뒤집고,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대변인 역할까지 맡는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더욱 그렇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칠고 직설적인 화법과 잦은 말 바꾸기는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개별적인 '사운드 바이트(sound bite)'만으로 정책을 해석하면 오히려 미국 외교정책의 실제 방향을 잘못 읽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G7 정상회의 직후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주변국들이 모두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란에만 이를 금지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미국의 대이란 미사일 억제 정책이 수정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고, 이번 전쟁에서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중동 국가들의 안보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곧바로 미국의 정책 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곧바로 중동 순방에 나서 미국의 안보 공약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을 거듭 확인하며 동맹국들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이 아시아 동맹국들을 방문해 미국의 방위 공약을 재확인했던 이른바 '안심 순방(reassurance tour)'을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 시대 미국 외교를 읽는 법은 대통령의 한마디를 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그 발언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지 끝까지 추적하는 과정이다.

미국은 여전히 한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다. 그러나 우리가 치열하게 읽어내야 할 것은 미국의 '외교정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외교를 뒤흔드는 미국의 '국내 정치'다. 결국 한국이 상대하는 것은 추상적인 '미국'이 아니라, 국내 정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특정 행정부이기 때문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김연호 조지워싱턴대 한국학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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