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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경계에 금을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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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객원 기자

승인 : 2026. 07.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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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미술관 개관 프로젝트 '균열: 충남의 아방가르드’展
김순기·성능경·황규태·박영숙 통해 한국현대미술의 새 언어 되짚어
서울 중심 미술사 속 충남의 의미 재조명
천안시립 (2)
천안시립미술관에 마련된 황규태 작품 전시 공간. 전면의 대형 작품 '불타는 도시 1'을 비롯해 사진의 기록성을 해체하고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한 작가의 실험을 만날 수 있다. / 사진 전형찬 기자
오늘날 설치미술, 미디어아트, 퍼포먼스는 미술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표현 방식이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이러한 시도는 낯설고 급진적인 실험이었다. 회화와 조각 중심의 전통적인 미술 경계를 넘어 언어를 작품으로 삼고, 사진의 이미지를 해체하며, 몸의 움직임과 일상의 행위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인 작가들은 굳어진 미술 질서에 작은 금을 냈다. 충남 천안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균열: 충남의 아방가르드'는 바로 이 틈에서 시작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언어를 되짚는다.

이번 전시는 2027년 개관을 준비하는 충남미술관의 사전 프로젝트이자 천안시립미술관, 고암이응노생가기념관과 함께 마련한 공공미술관 협력 전시다. 충남과 인연을 맺은 작가들의 예술적 성취를 지역 미술사의 관점에서 다시 살피는 동시에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 속에서 충남이 차지하는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시도다.

천안시립 (3)
김순기의 작품이 전시된 공간. 오른쪽의 '색동 TV 만다라'는 한국적 색채인 색동과 현대적 매체인 TV 이미지를 결합해 전통과 기술의 경계를 넘나든다. / 사진 전형찬 기자
'균열'은 단순한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익숙한 질서에 생긴 틈을 통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가능성이 드러나고 새로운 사유와 표현이 시작된다는 의미에 가깝다. 기존 미술의 규칙을 거부하거나 비껴간 작가들의 작업은 당시에는 낯선 충격이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을 확장한 중요한 움직임으로 자리 잡았다.

1960~1970년대 한국 사회는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정치적 격변을 동시에 통과하고 있었다. 미술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기보다 변화한 시대를 설명할 새로운 언어를 요구받았다. 이 시기에 등장한 실험미술은 회화 중심의 기존 미술관념에서 벗어나 사진과 영상, 퍼포먼스, 개념미술, 설치, 신문과 인쇄매체 등으로 표현의 범위를 넓혔다. 작품은 더 이상 완성된 물건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제작 과정과 작가의 행위, 기록과 언어, 작품을 성립시키는 발상 자체도 예술의 일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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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의 흑백사진 작품들. 여성의 일상과 사회적 위치를 카메라에 담으며 개인의 삶을 당대의 사회적 기록으로 확장한다. / 사진 전형찬 기자
이번 전시는 변화의 한복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의 경계를 흔든 김순기, 성능경, 황규태, 박영숙의 작업을 한자리에 모았다. 다룬 매체와 문제의식은 달랐지만 이들의 작업은 기존 규칙을 의심하며 예술이 무엇인지를 다시 물었다는 점에서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김순기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영상과 설치, 퍼포먼스, 언어를 넘나들며 예술과 삶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철학과 과학을 자유롭게 가로지르는 그의 작업은 하나의 장르로 쉽게 정의하기 어렵다. 특히 '색동 TV 만다라'는 그의 예술세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색동을 연상시키는 수직의 색면을 반복하며 전통적 색채 감각과 현대 매체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한 화면에 겹쳐 놓는다. 서로 다른 색면은 일정한 리듬을 만들면서도 하나의 질서로 완전히 수렴하지 않는다. 전통과 현대, 동양적 사유와 현대 매체가 나란히 놓인 화면은 경계를 구분하기보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드러낸다.

성능경은 언어와 정보, 일상적 행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한국 개념미술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는 신문을 읽고 오리고 붙이는 반복적인 행위와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언어와 이미지, 권력과 검열의 구조를 탐구해 왔다. 그의 작업은 완성된 결과보다 과정과 수행 자체에 주목하며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정보와 의미의 체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눈앞의 이미지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드러나고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관람객 역시 작품의 의미를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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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이 천안시립미술관 기획전 '균열: 충남의 아방가르드'의 전시 소개를 읽고 있다. 전시는 김순기, 성능경, 황규태, 박영숙의 작업을 통해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과 충남 미술의 의미를 되짚는다. / 사진 전형찬 기자
황규태는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기록 수단으로 여겨졌던 사진을 해체와 재구성의 대상으로 바꿨다. 필름을 태우고 긁거나 이미지를 확대하고 중첩하는 방식으로 사진이 반드시 현실의 표면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믿음에 균열을 냈다. 그의 사진에서 카메라는 세상을 복사하는 기계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도구가 된다. 그의 '불타는 도시 1'은 실제 도시를 촬영한 기록처럼 보이면서도 뒤섞인 색과 형상이 익숙한 도시의 풍경을 불안하고 낯선 장면으로 바꿔 놓는다. 이처럼 그의 사진은 현실의 증거라기보다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에 가깝다. 디지털 이미지의 합성과 변형이 일상이 된 지금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아날로그 사진이 객관적 기록의 매체로 인식되던 시기 그의 실험은 사진의 본질 자체를 되묻는 작업이었다.

박영숙은 사진을 통해 여성의 삶과 사회적 시선을 기록해 왔다. 인물의 외형을 담는 데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과 규범을 카메라 앞에 드러냈다. 전시장에 배치된 흑백사진 속 여성들은 거리와 실내, 자연 속에 서 있다. 일상적인 장면처럼 보이지만 인물의 자세와 공간, 카메라와의 거리는 여성의 존재가 사회 안에서 어떻게 보이고 규정돼 왔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흑백의 화면에 담긴 거리와 방, 들판은 개인의 기억인 동시에 당대 여성들의 삶을 증언하는 사회적 풍경으로 확장된다.

전시장은 이들 작가 4인의 차이를 비교하면서 각각의 실험을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됐다. 벽면을 따라 대형 사진과 흑백 연작, 회화와 영상 작업이 이어지고, 한쪽에는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과 주요 활동을 정리한 자료가 자리한다.

이번 전시는 과거의 실험을 회고하거나 몇몇 작가의 성취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오늘날 동시대 미술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설치와 퍼포먼스, 사진의 변형, 영상과 텍스트의 결합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충남이라는 지역성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다. 충남과 인연을 가진 작가들의 작업은 지역이 중앙의 바깥에 머문 공간이 아니라 한국 현대미술의 변화를 만들어낸 또 하나의 기반이었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8월 23일까지 천안시립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열린다.
전형찬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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