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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가 끝났지만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선수들이 한 명씩 나올 때마다 손을 맞잡았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건네고, 오랜 시간 함께 땀 흘린 이들을 일일이 배웅했다. 2024년 12월 열린 HL 안양 아이스하키단 창단 30주년 기념식에서 정몽원 HL그룹 회장이 보여준 모습이다. 그룹을 이끄는 총수의 위엄보다 동료들을 향한 고마움과 애틋함이 먼저 읽혔다. 그에게 선수들은 단순한 소속 구성원이 아니었다. 30년 세월을 함께 견디고, 웃고 울며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온 가족과도 같은 존재다.
정 회장의 경영을 관통하는 철학은 '사람이 자산'이라는 믿음이다. 아이스하키를 향한 30년 넘는 변함없는 애정도, 외환위기라는 거센 파고 속에서 무너진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운 과정도 결국 사람을 중심에 둔 그의 경영관과 맞닿아 있다. 성과만큼이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위기의 순간일수록 함께하는 이들의 가치를 믿는 경영자다. 그에게 경영과 아이스하키는 별개의 세계가 아니다. 빙판 위에서 몸을 부딪치며 하나의 골을 만들어내듯 기업 역시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야 위기를 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혼자가 아닌 함께 싸워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것. 정 회장이 30년간 빙판에서 확인하고 경영 현장에서 실천해 온 믿음이다.
 | 1994년 12월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 창단식 | 0 | | 1994년 12월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팀 창단식./HL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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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시무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정몽원 회장 | 0 | | 1999년 시무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정몽원 회장./HL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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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취임 첫해 닥친 외환위기…10년 기다려 만도 되찾다
1955년 고(故)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태어난 정 회장은 현대가(家)의 일원이다. 부친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동생으로, 1962년 현대양행을 설립해 한라그룹의 기틀을 닦았다. 고려대와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정 회장은 한라해운에서 경영 수업을 시작해 1986년 한라공조 대표이사에 올랐다. 그가 그룹 지휘봉을 잡은 것은 1997년 1월이다. 그러나 그해 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자금난을 겪던 그룹은 부도를 맞았다. 회장에 오른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부친이 평생 일군 기업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계열사들은 하나둘 그룹의 품을 떠났다. 자동차 부품 사업의 핵심이었던 만도까지 매각해야 했다. 정 회장에게는 기업 하나를 잃는 것 이상의 아픔이었다. 그는 훗날 당시를 경영자로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참담하고 아픈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정 회장은 남은 사업을 추스르며 재건의 기회를 기다렸다. 중심에는 만도가 있었다. 2006년 세상을 떠난 부친이 생전 만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뜻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만도 재인수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마침내 2008년 한라건설을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이 만도 인수에 나섰고, 그해 3월 만도를 다시 그룹의 품으로 돌려놓았다. 회사를 떠나보낸 지 약 10년 만이었다. 정 회장은 훗날 만도를 되찾은 순간을 경영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때로 꼽았다. 그러나 재인수가 끝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2012년 임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만도가 아직 일류 기업이 아니라고 질타하며 변화와 혁신을 주문했다. 기업은 한 번의 성공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 2008년 1월 만도지분인수계약 체결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정몽원 회장 | 0 | | 2008년 1월 만도지분인수계약 체결식에서 발언하고 있는 정몽원 회장./HL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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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정몽원 회장(오른쪽)이 전자식 브레이크인 '무궁화(MGH)-100' 양산 1호 제품에 기념 사인을 하고 있다. | 0 | | 2018년 정몽원 회장(오른쪽)이 전자식 브레이크 '무궁화(MGH)-100' 양산 1호 제품에 기념 사인을 하고 있다./HL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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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보다 함께하는 과정…30년 빙판에서 배운 경영
정 회장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무대는 아이스링크다. 1994년 만도 위니아 아이스하키단을 창단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와 치열한 승부, 무엇보다 선수들이 하나로 움직이는 팀워
크에 매료됐다. 그의 애정은 그룹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도 식지 않았다. 외환위기로 계열사 대부분을 떠나보내는 상황에서도 아이스하키단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선수들은 1998년 코리아리그 우승으로 보답했다. 회사의 앞날조차 장담하기 어려웠던 시절 빙판 위 승전보는 정 회장에게 다시 일어설 힘이 됐다.
아이스하키는 그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2022년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정 회장은 아이스하키로 에너지를 재충전했고, 그 열정이 만도를 되찾는 원동력이 됐다고 밝혔다. 그는 2020년 한국인 최초로 IIHF 명예의 전당에 선정됐다. 경기장에서는 기업 총수라는 직함도 내려놓는다. 2010년 HL 안양의 아시아리그 첫 우승 당시 기념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관중석에서 응원 율동까지 따라 했다. 아내가 주변 시선을 의식해 말렸지만 선수들과 같은 마음이 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정 회장은 2013년부터 2021년까지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을 맡아 국제 경쟁력 강화에도 힘썼다. 2017년 남자 대표팀이 세계선수권 최상위 디비전으로 승격했고, 이듬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가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에 섰다. 지난해에는 빙판과의 인연을 담은 에세이 '한국도 아이스하키 합니다'를 펴냈다. 경영 성공담이 아닌 비인기 스포츠를 주제로 책을 낸 것도 이례적이다. 그가 강조한 것은 뛰어난 선수 한두 명보다 서로를 믿고 움직이는 팀워크였다. 창단 30주년 행사에서 선수들을 한 명씩 배웅한 모습도 이러한 철학과 맞닿아 있다.
 | 정몽원 회장이 2022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IIHF 명예의 전당 세레모니에서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착용하기에 앞서 뤼크 타르디프 IIHF 회장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0 | | 정몽원 회장이 2022년 핀란드 탐페레에서 열린 IIHF 명예의 전당 세레모니에서 한국 대표팀 유니폼을 착용하기에 앞서 뤼크 타르디프 IIHF 회장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HL그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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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가르침 가슴에…자율주행·로봇으로 또 다른 승부
정 회장의 경영철학에는 부친 정인영 명예회장의 가르침도 자리하고 있다. 정 명예회장이 강조한 '학여역수행주 부진즉퇴(學如逆水行舟 不進則退)'는 배움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아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뜻이다. 정 회장이 만도를 되찾은 뒤에도 변화와 혁신을 강조한 이유다. 자동차 부품 산업의 경쟁력이 기계적 완성도에 있었다면 이제는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AI), 자율주행 기술이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다.
정 회장은 2022년 그룹 이름을 한라에서 HL로 바꾸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HL만도의 제동·조향·현가 기술을 강화하는 한편 HL클레무브를 통해 자율주행 기술을 육성하고 있다. HL로보틱스를 앞세워 로봇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도 HL그룹은 자율주행과 로봇 등 미래 기술을 선보였다. 자동차의 움직임을 제어하던 기술을 다양한 이동수단과 로봇으로 확장하려는 구상이다. 그의 아이스하키 사랑은 미래 사업의 이름에도 남아 있다. HL그룹은 자율주행 시험 차량에 '하키(Hockey)', 순찰 로봇에는 골키퍼를 뜻하는 '골리(Goalie)'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영과 스포츠를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 정 회장의 면모다.
물론 앞으로의 승부도 쉽지만은 않다. 자동차 산업이 전동화와 자율주행, AI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기술 경쟁과 기존 사업의 수익성 확보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외환위기가 기업의 생존을 위협했다면 지금은 산업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아야 한다. 정 회장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기업만이 아니었다. 멈추지 않고 배우라는 가르침과 사람과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외환위기라는 거센 물살을 거슬러 잃어버린 회사를 되찾았고, 빙판 위에서는 30년 넘게 선수들과 승리와 패배를 견뎌왔다. 이제 자율주행과 로봇이라는 새로운 미래 앞에서도 원칙은 같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처지고, 함께하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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