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62년 일본에서 수입해 시판된 새나라 자동차. 수입과정에서 2억5000만환의 공화당 정치자금이 조성됐다. |
새나라자동차 사건은 1961년 12월 김종필 당시 중정 부장의 부하 석정선 제2국장 등이, 재일교포를 끌어들여 국내에 자동차 조립공장을 건설,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정치자금을 조성하자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
당시 서울시내의 택시는 모두 시발택시였다. 1950년대 장안의 명물이었던 이 택시는, 그러나 군용지프를 개조한 것이어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관광객을 유치하고 국내 자동차공업도 육성할 겸해서, 날씬한 일제 소형차의 부품을 수입해 국내에서 조립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중정은 재일 거류민단 부단장을 지낸 재일교포 실업인 박노정을 점찍었다. 1961년 12월 김종필이 일본에 파견한 에이전트 최영택은 박노정을 만나, 포섭하는 데 성공한다.
새나라공업주식회사는 자본금 1억 원으로 설립됐다.
박노정은 이중 3000만 원을 출자했고, 나머지는 한일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해결했다. 당시 한일은행에는 김종필의 친형 김종락이 상무로 앉아있었다.
1962년 5월 최고회의는, 향후 5년 간 자동차부품 수입을 무관세로 하고, 자동차세를 감면하는 내용의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했다. 자동차공업 육성을 명분으로 새나라에 특혜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품수입, 조립생산이란 말뿐이었다. 새나라는 부품이 아닌 일제 완성차를 수입했던 것이다. 무려 2000여 대를 무관세로.
이 많은 일제 택시들이 거리를 누비게 되자, 시발택시들은 시골길로 밀려났다.
이 일제 승용차는 대당 13만 원에 수입, 국내 업자들에게는 그 2배에 가까운 25만원에 넘겨졌다. 이 과정에서 김종필 라인은 2억5000만 원의 부당이득을 챙겨, 정치자금으로 조성했다.
그런데 새나라의 첫해 이익금 분배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박노정이 생각했던 만큼의 이익금을 배당 받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각계에 진정서를 돌리며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노발대발한 김종필은 체포명령을 내렸다. 이를 눈치챈 박노정은 숙소인 반도호텔을 뒤쳐 나와 부산으로 달아나,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쳤다.
결국 모국의 실권자를 등에 업고 한 몫 잡아보려던 박노정은 원금까지 고스란히 날리고, 일본에서는 밀입국 혐의로 체포돼 곤욕까지 치렀다고 한다.
이 사건을 주도한 석정선은 1963년 3월 구속돼 조사를 받다가, 한달 후 풀려났다.
비슷한 시기 터진 또 다른 의혹사건이 워커힐 사건이다.
5.16 쿠데타 한 달여 후인 6월. 김종필은 경치 좋은 한강변에 최신식 초호화 호텔을 지어 외국관광객을 유치, 외화를 벌어들이겠다는, 당시로는 참신하고 대담한 구상에 착수한다.
이어 7월 석정선을 중심으로 워커힐 건설을 위한 사단법인이 설립되고, 중앙정보부 임병주 과장이 건설사무소장이 됐다.
10월 4일 김종필은 재무부장관, 교통부장관, 경제기획원 부원장, 서울시장, 한국전력사장 및 산업은행총재 등을 불러, 워커힐 건설자금 65억 환 조달을 위한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정부예산에서 16억환, 산업은행융자로 12억 환, 서울시 6억 환, 한국전력이 1억 환을 각각 조달키로 했다.
며칠 후, 건설사무소장인 임병수 중령이 나익진 산은총재를 찾아와, 워커힐 건설자금 대출을 요구했다. 다음은 《인물은행사》에서 나익진이 밝힌 내막.
나 총재가 "도대체 이 일을 맡아하는 주체가 누구냐?"고 캐물었더니, 임 소장은 답변을 회피하면서, "사단법인으로 운영할 계획이며, 대출상환은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해서 그 수입으로 변제할 예정"이라며, 은근한 압력을 가해왔다.
나 총재는 난처했다. 은행원 입장에서야 도저히 수락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궁리 끝에 나 총재는 "이것을 국립으로 하시오. 그러면 혹 잘못되는 경우라도, 국립은행에서 국립기관에 내는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거요. 그러나 사단법인체에 이런 큰돈을 내는데, 담보도 상환계획도 불확실해 가지고는 곤란합니다"라고 요구했다.
이에 임 소장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산은대출이 나가게 된 것이다.
이윽고 워커힐 부지로 내정된 광나루 밖 임야 18만 평에 대해 토지수용령이 발동됐다. 주민들은 시가 2800만 환 짜리 땅을 겨우 430만 환이라는 헐값에 넘기고 쫓겨나야 했다.
공사는 육군공병대와 군형무소 수감자들까지 연인원 2만4000여 명을 동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2년 말 '한국의 라스베가스'로 불린 워커힐이 한강변 언덕에 우뚝 솟았다. 카지노, 수영장, 나이트클럽, 회전무대, 고급살롱 및 사격장까지 갖춘 환락의 궁전이었다.
그러나 준공도 되기 전에 건설주역들의 부정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은 그들의 혐의내용.
"임 소장과 유재명 경리과장은 제일은행에서 융자받은 공사대금 3970만원(제2차 통화개혁 이후 시점) 중 200만 원을 워커힐 고문이던 정해직이 운영하던 동해장유에 무단 대부하고, 보관중인 입찰보증금을 잃어버리자, 퇴직사원이 계속 근무하는 것처럼 서류를 조작해 인건비를 지출한 것으로 꾸몄다.
또 석정선 중정 제2국장의 지시로, 건축자재를 공화당사로 내정된 옛 세브란스병원 건물의 수리용으로 빼돌렸고, 접대비 마련을 위해 6000만 원의 공사를 맡은 시공회사 삼환기업으로부터 180만 원을 수뢰했다"
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고책임자인 김종필을 향해 의혹의 화살이 날아오고 있었다.
김종필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워커힐 공사가 한창이던 1962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박춘식 교통부장관과 신두영 관광공사총재에게 압력을 넣어, 정부지분 5억3600만 원을 건설자금 명목으로 뽑아내 가불형식으로 전용함으로써, 막대한 공사대금을 정치자금으로 빼돌렸다는 의혹이다.
또 중정은 나이트클럽에 사용된 고급자재를 검사도 관세도 없이 일본에서 수입, 15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치자금과 관련된 비리의혹이 난무하자, 워커힐이 주고객으로 잡았던 주한미군에 출입금지령이 떨어졌다. 결국 워커힐은 외화획득은 커녕, 금융기관들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4대 의혹 중 마지막 하나는 빠찡코 의혹사건인데, 이 사건은 금융계와는 별 관련이 없다.
김종필이 회전당구, 일명 빠찡코 기계를 일본에서 들여와 업자들에게 고가에 불하, 그 차액으로 막대한 리베이트를 챙겨 정치자금화 했는데, 국민들의 사행심을 조장한다는 여론의 비난으로 정부가 1962년 10월 빠찡코 유기시설을 폐쇄하자, 업자들이 반발해 그 흑막을 폭로한 사건이다.
이 4대 의혹사건에 대해, 김종필은 나중에 이렇게 변명한 적이 있다.
"화폐개혁,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증권파동 등, 이런 것들이 모두 나 혼자서 한 것은 아니며, 시작은 서로 같이 해놓고 문제가 어렵게 되자 모두들 발뺌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내가 당하고 말게 되었는데, 역시 내가 협조를 덜했고 또 너무나 의욕에만 부풀어 급하게 서둘렀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중앙정보부장이란 무서운 직함 때문에 무서워서 동의했지, 본의가 아니었다고 발뺌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이런 식이니, 누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사실 지휘관이란 권한을 하급자에게 대행시킬 수는 있을지언정, 그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시킬 수는 없다. 그러니 '좋다. 내가 책임을 지겠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자금과 관련된 군정기간의 부정은 과거에 비해 그 규모나 수법이 엄청난 것이었다.
예를 들면 공화당 조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증권조작 등,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이다. 수법의 교묘함과 대담성, 그리고 말아 올린 돈의 거액에 정치인들의 부정에는 이골이 나다시피한 기자들도 입이 딱 벌어졌다.
군정말기에 쏟아져 나온 부정사태를 보고, 기자들은 '막판의 먹자판'이라고 개탄하였다" (이상우,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