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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샐러리맨에서 투자금융 거물로…박현주는 누구인가

증권사 샐러리맨에서 투자금융 거물로…박현주는 누구인가

기사승인 2021. 03. 0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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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창업 25년, 박현주의 빛과 그림자]
월 12만원 벌던 여의도 샐러리맨
39세에 미래에셋캐피탈 설립해
뮤츄얼 펀드 박현주 1호 출시
대우증권 인수로 퀀텀점프
향후 승계·지배구조 변화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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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박현주 회장이 미래에셋그룹을 창업한 지 올해로 25년 차를 맞았다. 외환위기를 거쳐 격변의 세월동안 미래에셋은 한국 자본시장의 새 역사를 썼다. ‘국내 1호 자산운용사’, ‘국내 1호 공모펀드 출시’ ‘국내 운용사 최초 해외(인도·중국) 진출’…. 미래에셋엔 유독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따라 다닌다. 과거 은행에 예금을 하던 저축의 시대에서 ‘투자의 시대’로 전환한 개척자 역할을 했다.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한 미래에셋은 자산운용·증권·보험사를 거느리며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 재계 순위 19위로 성장했다. 그 중심엔 ‘맨손’으로 지금의 미래에셋을 일군 박 회장이 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의 기업가 기질을 볼 수 있는 어록이다. 박 회장의 목표는 ‘글로벌 톱티어’다. 도전과 혁신으로 일궈온 미래에셋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조명해본다.

아시아투데이 오경희 기자 = ‘샐러리맨 신화’ ‘자수성가형 금융인’ ‘자본시장의 개척자’ ‘혁신가’….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의 이름 석자 앞에 따라 붙는 수식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 회장은 월급 12만원을 받는 평범한 여의도 증권사 샐러리맨이었다. ‘금수저’는 아니었지만, 타고난 무기는 비범했다. ‘도전 정신과 동물적 투자 감각’을 지녔다. 27세에 자본시장에 뛰어든 그는 업계에서 갈고 닦은 경험과 적은 자본금을 밑천으로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투자 없이 성장은 없다”는 일념으로 숨가쁘게 달렸다. 공격적인 행보로 업계의 주목을 받으며 자본시장을 선도했다. 빛엔 그림자도 있는 법. 실패도 맛봤다. 2008년 ‘박현주’라는 브랜드를 등에 업고 출시한 ‘인사이트펀드’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참담한 수익률을 냈다. 당시 해당 펀드는 중국사업에 자금의 80% 이상을 투자했다. 2015년 대우증권 인수 과정에서 조직융합 등 합병 후유증도 겪어야 했다. 박 회장은 실패와 좌절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동안, 박 회장은 고객자산만 500조원 이상을 굴리는 금융투자그룹의 오너가 됐다.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박 회장을 오래 지켜본 이들은 ‘자기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고 김정태 초대 통합 국민은행장은 1990년대 후반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전무로 있을 때 박 회장과 처음 만났다. 2006년 당시 한 칼럼에서 김 행장은 그에 대해 “한 젊은이에게서 처음엔 패기만 보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열정과 재주 등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또 잘 나가던 증권맨이었던 박 회장이 어느 날 사표를 내면서 “39살에 창업할 계획입니다. 꼭 실행할겁니다”라고 말한 일화도 소개했다. 김 행장은 “(박 회장이) 시장 움직임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다”면서 “신속한 분석과 판단이 서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능력 또한 높이 사고 싶다”고 밝혔다.

김 행장의 회고는 박 회장의 성품과 경영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 회장의 경영 기조는 ‘성장이란 도전을 통한 새로운 시장 창조’다. 외형에 집착하기보다 고객 중심의 신시장 개척을 해야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봤다. 다른 금융사에 비해 유독 ‘최초 타이틀’이 많고, 일찌기 박 회장이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린 이유다.

금융투자업계에선 ‘백그라운드 없이’ 자수성가한 박 회장 같은 성공신화가 다시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다만 우려의 시선이 있다면 공고한 ‘1인 지배체제’란 점이다. 과거 그는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겠다고 강조해왔다.

박 회장의 오랜 꿈은 미래에셋을 ‘한국형 골드만삭스’로 키우는 것이다. 쉼 없는 도전 길에서 그는 또 어떤 ‘새로운 이정표’를 찍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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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꿈은 10억과 바꿀 수 없었다”…39살에 창업

올해로 만 62세, 박 회장 인생의 첫 번째 중요한 ‘베팅’은 증권업 선택이었다. 광주제일고를 나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7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에 입사했다. 월급은 성과급을 제외한 12만원으로, 박봉이었다. 호황이던 종합금융회사 월급은 80만원이었다. 증권사 직원들은 ‘꼴등 신랑감’이란 말을 들을 정도였다. 연세대 영문과 출신인 김미경 씨와 연애결혼한 그는 장인 장모를 만났을 때, ‘왜 증권업이 성장 가능성이 있는가’를 설명하고 나서야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부부는 슬하에 2녀 1남을 뒀다.

박 회장은 한국 경제의 성장을 고려하면 결국 자본시장 규모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2년 뒤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옮겼고, 승승장구했다. 32세에 을지로 중앙지점장을 맡아 ‘최연소 지점장’ 타이틀을 달았고, ‘전국 1등 점포’로 만들었다. 기업의 별이라는 ‘이사’도 남들보다 빨리 달았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여의도 증권맨들 중에서 박현주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 나가던 증권맨은 유혹을 뿌리치고 돌연 사표를 냈다. 차장 직함을 달았을때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원이란 파격 조건을 제시했지만 거절했다. 서울 강남 아파트 평당 가격이 35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박 회장은 돈에 자신의 꿈을 팔고 싶지 않았다. 대학시절 증권가를 돌아다니며 주식 투자를 익힌 그는 ‘이 다음에 자산운용을 꼭 하고 싶다’고 마음 먹었었다.

1997년 39살이 되던 해, 박 회장은 미래에셋 벤처캐피탈(현 미래에셋캐피탈)과 미래에셋투자자문(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했다. 직장생활 10년 동안 모은 돈을 보탰다. 자산운용업을 하고 싶었지만 인허가를 받기 어려웠고, 설립규정(납입자본금 100억원)이 낮아지면서 본격 자산운용업을 시작했다.

◆ 박현주 1호 펀드의 탄생…대우증권 인수 ‘승부수’

미래에셋은 창립 직후 IMF 위기를 맞았다. 코스피 지수는 바닥을 쳤고, ‘주식형 펀드 투자=손실’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박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운용 자금의 95%를 당시 금리가 높아져 있던 채권에, 5%를 선물에 투자했다. 채권과 선물로 수익을 거둔 후 주식에 투자했다. 비관론이 만연한 속에서 한국 시장이 지나치게 저평가됐다는 믿음이 컸다. 예·적금 중심의 재테크 시장에 1998년 ‘뮤츄얼 펀드 박현주 1호’를 내놓았다. 시장에선 흥행 여부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폐쇄형 뮤추얼 펀드는 가입 후 1년 동안 돈을 찾을 수 없어 단기 투자에 익숙한 고객들의 외면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판매 시작 3시간여 만에 500억원 어치가 완판됐고, 평균 수익률 90%대를 기록했다. 경쟁사들도 뮤츄얼펀드를 앞다퉈 출시했다. 아픔도 있었다. 2007년 출시한 인사이트 펀드가 이듬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리면서 수익률이 고꾸라졌다. ‘박현주 브랜드’를 믿고 투자한 이들이 많았기에 타격이 적지 않았다. 그는 실패를 ‘복기’의 대상으로 삼았다.

박 회장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고, 2005년 SK생명(현 미래에셋생명)을 1600억원에 인수했다. 금융그룹으로서 초석을 다졌다. 박 회장은 올해 초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자기자본을 가지고 투자하는 보험사를 만들어서 다른 영역을 개척해보고 싶었다”며 15년 전 보험사 인수를 결정한 이유를 회상했다.

미래에셋의 도약은 2015년 12월 대우증권 인수를 계기로 이뤄졌다. 박 회장은 2조4000억원의 ‘통 큰 베팅’으로 한국투자증권과 KB금융지주를 물리치고 최종 승자가 됐다. ‘승부사’ 기질을 가진 박 회장은 반드시 인수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주변에선 반신반의했다. 자산운용업에 기반을 둔 5위 증권사 미래에셋증권이 1위 대우증권을 인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함께 일했던 이들은 그를 보면 ‘경주마’와 ‘골프’를 떠올렸다. 결정을 하기까지는 신중하지만 한번 내린 결정은 과감히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또, 박 회장이 골프를 처음 배울 때, 갈비뼈에 금이 간 줄도 모르고 하루에만 6시간 가까이 연습을 했다고 한다.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마는 성격인 걸 알 수 있다.

박 회장은 결국 해냈다. 대우증권은 미래에셋대우로 통합출범했고, 자기자본 기준 국내 1위 초대형 증권사로 발돋음했다. 그는 “미래에셋대우와 대우증권의 합병을 통해 한국 금융산업과 자본시장의 DNA를 바꿔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미래에셋그룹은 재계 순위 29위권에서 19위로 퀀텀점프했다. 박 회장은 인수를 확정 짓자 회사 창립 후 18년 만에 처음으로 낮술을 기분좋게 한껏 마셨다. 그의 평소 주량은 와인 소량이다. 인수 후엔 전략과 문화 차이가 뚜렷한 조직 간 융합 문제 등을 극복해야 했다.

◆ “금융은 수출산업” 해외로…신성장 동력은

대우증권을 품에 안은 박 회장은 해외사업을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미래에셋대우를 글로벌 투자금융회사로 키워나가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미래에셋그룹은 증권, 자산운용, 보험을 아우르며 자본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그는 일찌감치 국내에서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1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외환위기의 교훈을 떠올렸다. 고객의 입장에서 한 국가에만 투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봤다. 유학 기간 중 박 회장은 미래에셋을 아시아의 대표적인 투자그룹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금융을 수출산업으로 키워서 원화가 달러를 벌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었다.

2003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국내 운용사 중 최초로 홍콩법인을 만들었고, 2007년 미래에셋증권은 홍콩지사를 만들었다. 박 회장은 2018년 돌연 회장직을 내려놓고, 글로벌 투자 기회 발굴을 위해 미래에셋대우 글로벌 경영전략 고문을 맡았다. 미래에셋은 현재 홍콩,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영국,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시장까지 국내외 15개 지역·40개 법인이 진출해 있다. 미래에셋 해외법인의 세전이익 실적은 업계 최초로 2000억원을 돌파한 이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공격적인 해외투자를 했던 만큼 코로나19는 악재다. 미래에셋은 글로벌 분산투자로 리스크에 대비해왔다는 설명이다. 해외에 머물던 박 회장도 국내에 체류하며 돌파구를 모색 중이다. ‘은둔의 경영자’로 알려진 그가 유튜브를 통해 투자자들과의 적극 소통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박 회장은 국내 증시 활황기를 맞아 ETF(상장지수펀드) 분산 투자와 퇴직연금 등 노후 자산관리 시장에 주목한다.

안으로는 지배구조와 승계 문제도 여전히 관심사다. 회사의 모태이자 지배구조 정점에 선 미래에셋컨설팅은 박 회장 등 총수일가가 91.86%의 지분을 보유해 지배하는 회사다. 박 회장이 지분율 48.6%로 최대주주이며, 배우자인 김미경씨(10.2%)와 자녀 은민·하민·준범(각 8.2%)씨가 모두 34.8% 지분을 갖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박 회장이 공들여 회사를 키워온 만큼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기지 않을까 한다”고 전망했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설립 당시부터 국내 한계를 극복하고 해외에서 먹거리를 찾아 외화를 벌어오자는 목표를 세웠다”며 “올해 자본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투자전문그룹으로서 우리나라 혁신금융의 활력을 높이는데 더욱 기여하고 한 단계 더 높은 퀄리티의 고객자산관리를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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