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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주정뱅이 아빠와 우유팩 글러브, 야구 역사 한 획 그은 푸홀스

술주정뱅이 아빠와 우유팩 글러브, 야구 역사 한 획 그은 푸홀스

기사승인 2022. 09. 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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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홀스
앨버트 푸홀스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다저스 원정 경기 700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며 양팔을 활짝 펴고 환호하고 있다. /UPI 연합
2000년대를 대표한 최고의 타자 중 하나인 알베르트 푸홀스(42·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마침내 꿈의 700홈런 고지를 점령했다. 어릴 적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정 형편과 불우한 환경을 딛고 야구 역사의 한 획을 그은 푸홀스는 "나는 아무것도 쫓지 않는다"며 "내가 쫓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우승 반지뿐"이라고 했다.

푸홀스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LA의 다저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LA 다저스전에서 통산 669호·700호 홈런을 동시에 터뜨렸다.

약 140년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 700홈런을 달성한 선수는 배리 본즈(762홈런), 행크 에런(755홈런), 베이브 루스(714홈런)에 이어 푸홀스가 네 번째다. 푸홀스는 애런에 이어 한 시즌 50홈런을 넘긴 적이 없음에도 700홈런 클럽에 도달한 두 번째 선수가 됐다. 그만큼 22년간 꾸준했다는 의미다.

푸홀스는 도미니카공화국 이민자로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딛고 지금 이 자리에 선 입지전적인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릴 적 푸홀스가 기억하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빈곤 그 자체였다. 다른 또래들처럼 야구를 좋아하던 푸홀스는 우유팩으로 글러브를 만들어 레몬을 던지면서 열정을 키웠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치였다. 어머니가 어릴 적 그의 곁을 떠나면서 아버지 밑에서 힘겹게 커야 했다. 소프트볼을 했던 그 시절 아버지는 술 주정뱅이였다고 푸홀스는 회상한다.

푸홀스 인생은 16세가 되면서 큰 전환점을 맞는다.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게 됐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꿨던 뉴욕을 떠나게 된 건 어느 날 우연히 식료품 가게에서 총격사건을 목격하면서다. 그 충격으로 가족은 친척들이 거주하던 미주리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푸홀스는 야구가 유일한 친구였다. 영어를 못했던 탓도 있지만 야구선수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남다른 포부가 그를 매일 채찍질했고 금세 지역의 야구 유망주로 떠올랐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 탓에 명문대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장학금을 준다는 작은 대학(메이플 우즈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해서 실력을 뽐냈다. 푸홀스는 서둘러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했고 한 번의 좌절 끝에 6만달러를 받고 세인트루이스에 입단했다. 이어 순식간에 마이너리그를 평정했다.

2001년 스프링캠프에 초대된 풋내기 푸홀스를 보고 당대 최고의 거포 마크 맥과이어가 토니 러루사 감독에게 "푸홀스를 로스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일생의 최대 실수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푸홀스는 2001년부터 22년간 메이저리그 무대를 누비며 큰돈을 벌고 명예를 쌓았다. 은퇴를 목전에 두고 이뤄낸 700홈런을 최고의 훈장이다. 푸홀스는 MLB닷컴과 인터뷰에서 "내 가족이 사는 LA에서 그것도 세인트루이스 유니폼을 입고 기록을 달성해 특별하다"면서도 "22년 선수생활 내내 나는 아무것도 쫓지 않았다. 그 어떤 숫자도 개의치 않는다. 단 하나 내가 쫓는 것이 있다는 또 하나의 우승 반지뿐"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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