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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칼럼] 이승만정권이 친일 정권이라고?

[이한우 칼럼] 이승만정권이 친일 정권이라고?

기사승인 2024. 04. 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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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관련 역사 바로잡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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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문화센터장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한 그릇된 비판 중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이승만=친일파'라는 헛된 주장이다.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기 40일 전인 1945년 9월 6일 박헌영 세력이 주도한 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데 인민위원 55명 명단에 이승만, 김구, 조만식, 김성수, 신익희 등 우파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어 14일에 중앙위원회에서 사실상 그림자 내각이라 할 수 있는 정부 부서 명단을 발표했다.

"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정부장 김구, 외교부장 김규식, 군사부장 김원봉, 재정부장 조만식, 사법부장 김병로, 문교부장 김성수, 체신부장 신익희…." 이는 본인들 의견을 받아서 정해진 것은 아니고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이 당시 이상적으로 생각해 본 내각 명단이다.

과연 이승만 박사가 단 한 점이라도 친일 행위를 했다면 어떻게 이런 명단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독립운동가로서 이승만 박사의 지위는 당시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승만 박사는 1945년 10월 16일 환국했다. 이어 23일 이 박사는 자신이 묵고 있던 조선호텔로 65개 정당과 단체 대표 200여 명을 모아놓고 단결을 강조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좌익 계열 학병동맹에서 민족 반역자 처단 문제를 들고나왔다. 이어 31일 이승만 박사는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4시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가졌다. 이승만은 통합을 강조했고 박헌영은 '선(先)숙청 후(後)통합'을 견지했다. 결국 박헌영은 11월 16일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탈퇴했다. 박헌영이 말한 민족 반역자 문제란 주로 일제 강점기 때 국내에 남아 있었던 우파 정치세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한민당은 그 핵심세력이었다.

이 문제는 11월 23일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면서 더 복잡하게 전개된다. 한민당을 비롯한 국내파를 보는 김구의 시각은 박헌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2월 중순 한민당 송진우, 장덕수 등이 임정 요인을 위한 환영 술자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임정파 신익희는 "국내에 있던 사람은 크거나 작거나 간에 모두 친일파"라고 속내를 털어놓았고 송진우는 "중국에서 궁할 때 뭣을 해 먹고서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신익희의 말은 그대로 김구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12월 30일 새벽 한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한현우라는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건국을 향한 투쟁이 2년여 동안 진행됐다. 김구와 경쟁 관계였던 이승만은 한민당 도움을 받아야 했다. 여기서 모호하게나마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는 비판이 생겨났다. 그러나 '과연 한민당이 곧 친일 세력이냐'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그것은 정치 공세일 뿐 사실에 입각한 비판은 아니다.

오히려 이승만의 '친일 비호' 논란은 그가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초대 대통령이 된 직후에 제기된다. '반민특위' 해산이 그것이다.

그에 앞서 이미 이승만 대통령이 조각(組閣)한 초대 내각에 친일 혹은 반민족 행위 경력자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음은 이미 학계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다. 다만 이와는 별도로 '두 사람 중 누가 더 책임이 많으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김구의 한독당 세력이 건국에서 배제됨으로써 임시정부 출신 사람들이 더 폭넓게 새 나라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신익희는 김구를 떠나 새나라 건설에 참여한 경우다.

그래서 초대 내각이 발표되자 일부 국민들은 각료 인선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입장은 단호했다. "악질적인 독립운동 방해자 이외에 친일파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초대 내각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세력은 한민당이었다. 이때부터 한민당은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제헌 헌법 101조에 "1948년 8월 15일 이전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었다. 그래서 국회에서 절차를 거쳐 정부에 넘겨져 1948년 9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법률 제3호로 공포했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반민특위 충돌은 행정부와 입법부 대립으로 이어졌다. 1949년 5월에는 국회프락치사건, 6월 6일에는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6월 26일에는 김구 암살 등이 연이어 터지면서 결국 반민특위는 8월 31일 활동을 중단했다.

이를 흔히 좌파 쪽에서는 "친일파가 반민특위를 무력화했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공격해 왔다. 그러나 국가건설을 진두지휘해야 했던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친일파'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를 통해 우파 진영을 무력화하려는 공세를 차단해야 했다.

'반민족 행위'와 '친일'은 전혀 다른 용어다. 반민족 행위는 구체적인 행위지만 친일은 하나의 카테고리일 뿐이다. 일본 경찰로 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반민족 행위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친일이라는 비판을 면키는 어렵다.

그래서 그 후에도 이 문제는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세력과 부정하려는 세력 간의 세계관 차이가 되어 지금까지도 역사 전쟁의 핵심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은 진보진영의 일방적 대한민국 실패론이 학계와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고 보수 쪽에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성공론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스토리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이 있었기에 김덕영 감독의 다큐 영화 '건국 전쟁'이 100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 건설'이라는 너무나도 힘들지만 동시에 한없이 벅찬 감동적 사업을 이제 우리는 차분히 되돌아 볼 때가 됐다. 그 사업을 일으키고 그 이야기마다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인물이다. 그의 큰 이야기를 다 알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장님 코끼리 더듬기식으로 대한민국 탄생 이야기를 파편화해서 자기비하를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승만 친일파 논란은 그중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문화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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