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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혈세로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부도덕한’ 카르텔

[칼럼] 혈세로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부도덕한’ 카르텔

기사승인 2016. 10. 0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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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같은 비효율적 정책금융시스템이 남아있는 한 대우조선 사태의 재발을 막기 어렵다. (그래서는) 진작 퇴출돼야 할 부실기업들은 연명하고, 성장가능한 곳에 투입돼야 할 국가재정은 낭비된다."


경제학자 출신 여의도연구원장 김종석 새누리당 의원의 진단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정책금융시스템은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고 질타했다. 우리나라 국책은행 중심의 정책금융시스템은 '혈세로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부도덕한 카르텔'이라는 것이다.  


그가 인용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대출행태를 지속한 결과, 국책은행은 일반 시중은행들에 비해 워크아웃 개시시점은 평균 2.5년 늦는 반면 부실징후 기업에 대한 자금지원 규모는 훨씬 더 컸다. 워크아웃 개시 후 주채권은행이 일반은행인 경우에 비해 자산매각에도 매우 소극적이었다. 대우조선 사태에서 보듯이 이를 매각하기보다는 자회사로 두고 여기에 퇴직 임직원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더 골몰했다.


대우조선 사태와 관련, 비리에 분개하는 사람들이 낙하산 인사 등을 비판하면서 이런 인사 관행을 막으면 문제가 해소될 것처럼 치부하는 게 보통이지만 경제학자답게 그는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다. 정책금융이라는 게 정치논리로 경제문제를 풀자는 것이며, 기업이 결정할 일을 정부가 대신하는 것이다. 이런 부도덕한 카르텔을 허물기 위해서는 산업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들을 민영화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새누리당의 공식 당론은 아니고 장기적 과제로 제시되었지만 이런 정책이 새누리당 싱크탱크에서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제 정치적으로 실천해내는 일이 남았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극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영화 과정에서 정치적 입김을 이용해 특권을 획득하려는 시도도 무력화시켜야 한다. 민영화 과정은 정치와 정부의 개입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정치실패 혹은 정부실패의 위험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민영화 추진세력이 잿밥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중요하다. 


사실 세계, 특히 영국을 번영의 시대로 이끌어간 자유무역의 '이론'은 곡물법 폐지를 진단했지만 이의 정치적 실천은 쉽지 않았다. 곡물법을 유지할 때 이득을 보는 지주계급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실패' 때문이다. 만약 정치권이 이들의 이해관계에 매몰됐다면 곡물법 폐지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주들로 구성된 토리당을 이끈 필(Peel) 총리조차 편협한 사익보다는 국민과 논리를 중심으로 판단했다. 그게 정치실패를 극복하게 했다. 콥덴을 중심으로 '반곡물법 동맹'이 활발하게 폐지운동을 펼친 점도 주효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종석 의원이 '국책은행 폐지를 위한 동맹'을 탄생시켜 주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흥미로운 것은 국책은행의 좀비기업에 대한 대출의 '윤리성' 논란이다. 최근 국감에서 국회 정무위 김선동 의원(새누리당)은 산은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통해 산은이 지난 2009년부터 올 6월까지 분식회계 위반기업에 대해 신규 대출을 승인한 사례가 무려 총 36건, 8조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분식회계로 징계를 받았다는 것은 손실을 숨기고 상황이 좋은 것처럼 기만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그 기업의 사업전망이 나쁘고 향후에도 분식회계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인데, 산업은행은 이를 알면서도 이 기업들에 무려 8조원을 대출했다. 금융기법은커녕 상식에조차 전혀 부합되지 않고 비리 가능성까지 엿보이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혈세로 좀비기업을 연명시키는 부도덕'이란 표현이 가능하다.


민영화를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은 국책은행이 '기업의 이익'을 좇는 게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좇는 것이기 때문에 국책은행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제안 속에는 이렇게 워크아웃 개시를 늦추고 자회사로 유지하는 국책은행의 행태가 '공공'을 위한 윤리적 행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과연 그런가, 아니면 그런 행위가 '공공의 이익'을 내세운 개인적 이권의 추구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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