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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의 아리랑] <64> 여성 농민 찬양가 ‘처녀 농군’

[대중가요의 아리랑] <64> 여성 농민 찬양가 ‘처녀 농군’

기사승인 2023. 12. 03.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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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향래 대중문화평론가
'홀어머니 내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인데/ 이 몸이 처녀라고 이 몸이 처녀라고 남자 일을 못 하나요/ 소 몰고 논밭으로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홀로 계신 우리 엄마 내 모시고 사는 세상/ 이 몸이 여자라고 이 몸이 여자라고 남자 일을 못 하나요/ 꼴 망태 등에 메고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벌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일본 제국주의가 획책한 강압적 근대는 우리 농촌 사회를 해체한 주범이기도 했다. 더러는 항일 투쟁을 위해서 떠나고, 더러는 생존을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 군국주의가 마지막 횡포를 부리던 시절에는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농촌에는 젊은 일꾼들이 자리를 비웠다. 연약한 아녀자들이 남아서 힘겹게 농사를 이어가며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일제가 패망을 하고 광복을 맞았지만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숱한 젊은 목숨들이 포연 속으로 사라진 채 돌아오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1960년대 산업화의 열풍이 불면서 농촌의 청년들은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대도시로 떠나갔다. 한국의 농촌은 그렇게 허물어진 근력과 임시적인 인력으로 버텨야 하는 불구의 삶을 2대, 3대에 걸쳐 반복하며 무기력한 공동체의 슬픈 자화상을 상속해 왔다.

이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농촌을 자위하는 유행가들이 흘러나온 것이다. 떠난 사람들은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망향가에 실었고, 남은 사람들은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고향의 풍경에 담았다. 농촌과 고향에 남은 것은 주로 여성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에 나온 '처녀 농군'은 그렇게 빈 들녘에 남아 농사일에 진력하며 부모 봉양에 헌신하던 여성들의 애환을 담은 노래다.

민요풍에 트로트를 가미한 '초가삼간'으로 이미 인기 반열에 오른 최정자가 싱그러운 목소리로 부른 '처녀 농군'은 농촌 여성의 고달픈 이미지보다는 여성 농민의 야무지고 결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대중가요평론가 유차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농촌 1세대 처녀농군 찬양가'라고 할까. 그것은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으로 잘사는 농촌을 건설하려던 새마을운동의 활기찬 예광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이촌향도의 물결 속에 수많은 농촌 인력이 도시로 흘러들어갔지만 모두가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전쟁과 산업화의 여파로 남성들의 자리가 성긴 곳을 농촌에 남은 여성들이 채우며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농촌 여성의 강인한 이미지를 애써 담은 노래도 그렇게 탄생했을 것이다. 황정자가 부른 '처녀 뱃사공'에 이은 최정자의 '처녀 농군'이 그 대표적인 가요다.

'처녀 뱃사공'이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대에 간 오빠를 대신해 나룻배를 젓는 여성의 이야기였다면, '처녀 농군'은 산업화 시대를 맞아 도시로 떠나가는 이농(離農) 행렬과 떨어져 소를 몰고 논밭으로 나가는 여성의 모습은 그린 것이다. 기약도 없는 남자들을 기다리면서 때맞춰 시집도 못 간 채 부모를 모시고 동생들을 보살피며 농사일에 청춘을 소진한 슬픈 여성사가 아닐 수 없다.

대중가요는 시대의 정서와 민중의 감성을 담고 있다. 옛 고향의 황토빛 감흥을 떠올리는 '처녀 농군'은 남성 인력 부재의 쇠락한 농촌 정경과 연약한 몸으로 힘겨운 논밭 일을 떠안아야 했던 여성들의 애잔한 내면 풍경을 머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목가적인 들판을 누비며 부모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는 처녀 농군의 다부진 행보에 우리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일말의 쓸쓸함을 감추지는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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