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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진 대로 런던의 웨스트엔드 지역은 뉴욕 브로드웨이와 더불어 세계 뮤지컬 공연산업의 대명사 같은 곳이다. 이처럼 웨스트엔드에 유명한 뮤지컬 극장과 인기 있는 작품들이 몰려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런던에는 도시 곳곳에 나름대로 유서 깊은 뮤지컬 극장들이 자리 잡고 있고 그곳에서 매일 밤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뮤지컬들이 무대에 오른다.
선택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뮤지컬 중에서 어떤 작품을 봐야 하나 고민 끝에 고른 것은 로알드 달 원작의 ‘찰리와 초콜릿공장’과 ‘미스 사이공’ 2014 버전이었다. ‘찰리와 초콜릿공장’은 2013년 막이 올라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는 새로운 인기작 중 하나고 ‘미스 사이공’은 초연 25주년을 맞아 새롭게 꾸민 2014년 버전이다.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소설 ‘찰리와 초콜릿공장’은 개인적으로 사춘기 시절 초콜릿처럼 달콤한 꿈을 꾸게 해준 특별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로알드 달이라는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었고 이 소설이 영미권에서 얼마나 유명한 문학작품인지 몰랐지만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줬었다.
이 작품은 1971년과 2005년 두 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져 화제가 된 바 있는데 원작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설정과 환상적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나름대로 잘 풀어냈었다. 여러 가지 기법과 특수효과를 동원하기 쉬운 영화에 비해 제한된 공간에서 관객들과 직접 마주해야하는 라이브엔터테인먼트인 뮤지컬은 상대적으로 여러 가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이 가진 기상천외한 공간과 장치를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가 뮤지컬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가장 큰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극장을 찾았다. 작품이 공연된 로열 드루리 레인 극장은 1663년 문을 열어 여러 번의 개축과 재건축을 거쳐 오늘날까지 활발히 공연이 되는 런던의 역사적인 극장 중 하나로 ‘미스 사이공’이 초연된 극장이기도 하다.
이날 공연은 오색찬란한 롤리팝 사탕처럼 한 편의 달큼하고 경쾌한 동화였다. 음악과 드라마의 두 가지 측면에서 봤을 때 드라마의 존재감이 월등했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선보이는 노래와 그것에 따르는 춤은 흠 잡을 곳이 없었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보다 뚜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못지않은 화려한 무대장치와 다채로운 색감이었다.
심지어 가난한 찰리의 집과 남루한 차림의 가족들도 동화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세트 속에서 유쾌한 모습을 보여줬다. 찰리가 얻게 된 행운은 원래 답답할 정도로 빈곤하고 어려운 그의 가정형편 때문에 더 빛나고 극적인 효과가 생기는 것이니 만큼 누더기 이불대신 고운 무늬의 패치워크 이불을 덮고 있는 네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처럼 그저 동화적인 요소만 강조된 도입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반면 찰리와 함께 윙카씨의 공장투어에 참가하게 된 네 아동의 비뚤어진 개성을 강조한 퍼포먼스라든가 난쟁이 움파룸파족, 어린이들이 한 명씩 낙오해가는 과정은 원작에 나오는 묘사를 최대한 살려 기발하게 재현해냈다. 뭣보다 어린이 출연자 한명, 한명의 출중한 노래와 춤 실력이 돋보여 객석의 몰입을 이끌 수 있었다.
‘찰리와 초콜릿공장’은 현재 런던에서 ‘빌리 엘리어트’ ‘마틸다’와 함께 차세대 영국 뮤지컬시장을 이끌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는데 세 작품 모두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하지만 원작의 어린이들은 다들 인생이 마냥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번 뮤지컬에서도 초콜릿의 달콤한 맛뿐 아니라 쌉싸름한 맛도 살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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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웨스트엔드에 진출한 홍광호는 이 작품으로 2014 BWW UK 어워즈, 제15회 왓츠 온 스테이지 어워즈에서 뮤지컬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홍광호는 지난해 봄까지만 출연하기로 약속된 것을 알고 갔기에 이날 처음에는 투이 역으로 나오는 배우를 주목하지 않았는데 다시 보니 그 역시 한국 뮤지컬 배우 조상웅이었다.
‘미스 사이공’의 스펙터클한 무대는 듣던 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월남전 당시 사이공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바에서부터 전쟁의 광기와 긴박한 탈출, 베트남에 남겨진 킴과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크리스의 모습까지 등장인물의 개성은 강하게 부각됐고 극적 장치와 조명이 완벽한 무대는 쉴 틈 없이 역동적으로 전환됐다. 특히 적재적소에서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며 빛을 발하는 매혹적인 음악은 이 작품의 최대 공신이었다.
이날 킴을 맡은 에바 노블자다는 뉴 프로덕션에서 화제 속에 킴 역을 따낸 배우다. 실제로 아직 10대인 소녀지만 청순하면서도 강단이 느껴지는 음색으로 흔들림 없이 노래하며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여 초연 때 히로인이었던 레아 살롱가의 뒤를 잇는 새로운 킴의 존재를 알렸다. 킴과 크리스의 아름다운 러브테마나 비극적 결말이 이 작품의 관심요소지만 ‘미스 사이공’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역은 두 주인공을 이어주고 본의 아니게 끝까지 킴과 함께 하게 된 엔지니어일 것이다.
이번에 엔지니어를 맡은 존 존 브리온스는 이미 1989년 투어공연부터 미스 사이공과 함께 해 온 배우로 비음 섞인 매력적인 음성과 장면과 분위기를 전환할 때 마다 등장해서 이야기의 흐름의 이어주는 능숙한 연기로 큰 갈채를 받았다. 작은 체구의 그가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처절하게 노력하는 모습은 과거 우리나라 땅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던 인물형이라 더욱 공감이 갔다.
여기에 한국인으로 홍광호에 이어 투이 역할을 맡은 조상웅도 악역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역할을 연기와 노래 모두 잘 소화해 작품의 한 축을 완성시켰다. 이날 공연에는 또 한명의 한국인 배우가 출연했다. 이날은 바걸로 무대에 선 김수하는 킴 역할을 맡은 세 명의 여배우 중 한명으로 좋은 평가를 듣고 있다고 한다. 오페라도 그렇지만 뮤지컬 분야에서도 세계무대에서 주역급으로 활약하는 한국인 배우를 보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다.
‘미스 사이공’은 다이내믹한 무대와 탄탄한 구조의 드라마,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음악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는 헬리콥터 등장장면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뮤지컬역사에 남을 작품으로서 가치와 미덕은 충분해 보였다.
이 뮤지컬이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영감을 얻은 현대판 ‘나비부인’인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킴 역시 나비부인처럼 아들을 남편의 현재 부인에게 보내고 자살한다. 푸치니의 꿈속에서 완성된 희생적인 아시아 여인이 21세기에도 당당히 부활해 서양 관객들의 박수를 받는 것이다.
그저 한 편의 뮤지컬 작품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문화가 갖는 파급력과 이미지의 힘은 너무 크다. 그날 밤 눈을 빛내며 ‘미스 사이공’이 만들어 낸 아시아 여인의 환상에 빠져들었던 런던의 관객들이 무대 위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는 분별력을 갖길 바랄 뿐이다.
런던은 전통과 현대가 현재진행형으로 공존하는 묘한 도시다. 축축한 날씨는 변덕스럽고 사람들은 무표정하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극장으로 모여드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저녁 무대 위에서는 그날 그들이 건네고 싶었던 말과 부르고 싶었던 노래가 대신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yonu44@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