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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곽귀근은 경북체육중 시절 투포환선수 출신이었다. 하지만 지도교사의 권유에 따라 복싱으로 전환, 1978년 경북체고에 진학했다. 졸업반인 1980년 제4회 김명복배와 61회 전국체전 미들급에서 2관왕을 달성하면서 경북대에 진학했다. 이후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아시아 챌린져대회 우승, 유고월드컵 3위, 한미 국가대항전 우승을 일궈내며 명복서 반열에 우뚝섰다. 특히 1987년 한미 국가대항전에서는 후에 홀리필드를 꺾고 프로복싱 WBA, IBF 헤비급 세계정상에 올랐으며 데뷔전부터 26경기 연속 KO퍼레이드를 펼쳤던 마이클 무어러를 상대로 1회 KO승을 거둔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 해 치러진 1988년 서울올림픽 선발전에서도 홍기호에 1승1패, 하종호에 2연승을 거두고 1차 선발됐지만 고질적인 부상이 악화돼 최종 선발전을 앞두고 복싱을 접고 말았다. 그리고 1987년 6월부터 모교인 경북체고에 부임했다. 그는 지덕체인(智德體仁)을 겸비한 지도자로서 경북체고 복싱신화를 펼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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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귀근은 경북체고에 재임하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문경중학교로 전근을 가면서 외도를 한적이 있다. 문경중에서도 곽귀근의 복싱역사는 폭주기관차처럼 멈출 줄 몰랐다. 전국 중학 무대마저 평정한 것이다. 문경중은 2003년 제52회 중·고선수권대회에서 7명이 출전하여 무려 6체급을 휩쓸었는데 가히 명불허전(名不虛傳) 이라 부를만 하다
이후 체전성적을 올리라는 특명을 받고 경북체고에 2006년 컴백한 곽귀근은 도끼를 찍는시간보다 도끼날을 가는시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과학적 프로그램에 복싱을 접목시켜 가장 권위 있는 연맹회장배에서 5연패의 대업을 창출했다. 또한 ‘복서의 노래’란 곡을 작사·작곡하여 선수들에게 부르게 해 입문 때 가진 높은 이상과 희망을 졸업할 때까지 잃지말고 지탱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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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에게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의 절반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비도 삼고초려(三顧草廬) 했듯이 좋은스승을 찾아가는 것은 성공을 찾아가는것과 동일하다. 왜냐면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야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대구·경북의 아마복싱은 최약체 였다. 최점환, 박태국, 백종우, 강희용 등이 반짝 활동했을 뿐 주목할 만한 복서들이 전무한 상태였다. 하지만 곽귀근이 경북체고에 부임한 이후에 그의 미다스손(midas touch)을 거친 선수들이 봄날 개구리 튀어나오듯 속속 출연했다.
1990년 서울컵 최우수상과 1991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리스트인 박덕규, 1992년 캐나다 세계 청소년대표 유지윤, 1996년 아틀란타 올림픽 국가대표 배호조,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동메달 최진우, 2002년 부산아시안게인 금메달 김기석, 2009년 2011년 세계선수권 2회 연속 메달리스트인 신종훈 등이 주역들이다. 이토록 많은 선수들을 조련해 반석 위에 세울 수 있는 근원은 해박과 전문지식과 함께 강함보다는 부드러움 속에 무게를 두고 선수들을 가르치는 지도력 때문이다. 마치 바닷가의 조약돌이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 때문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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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귀근은 2~30대 젊은 두 코치와 담화에서도 수직관계가 아닌 수평적관계에서 교감해 소통을 중요시했고 코치들과 유기적인 하모니를 이루면서 잘되는 조직은 뭔가 이유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했다. 대화란 탁구와 같은 것이다. 한쪽에서 계속 공을치는데 받아줄 마음이 없다면 게임이 되지 않는 법이다. 상하결속의 기본은 소통이다. 문득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역작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이 생각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아있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기 때문에 서로에게 불행하다. 역시 조직이라는 단체는 사회·국가조직을 총망라하여 지도자를 핵심으로 일심동체(一心同體)해야 발전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올해도 내내 건승하고 승승장구 하길 바란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