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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그는 사실상의 국가 지도자였지만, 미얀마 군부는 여전히 정치·경제·사회 모든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그러던 2017년, 미얀마에서 로힝야 사태가 터졌다. 미얀마군이 로힝야 반군 소탕을 빌미로 군사작전을 감행했던 이 사건은 21세기에 난민사태를 낳았다. 연이어 미얀마군이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단행했고 이 과정에서 살인·방화·성폭행을 일삼았다는 폭로가 잇달았다.
그러나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민주주의의 상징’ 수 치 고문은 로힝야 사태를 외면했다. 미얀마는 90%의 국민이 불교도인데다, 영국 식민지배 시절 영국에 협력한 로힝야족에 대한 반감이 컸다. 앞서 군부독재를 거치며 다수 종족인 버마족과 불교를 중심으로 재편된 미얀마 사회에 로힝야족이 설 자리는 없었다. 로힝야 학살의 주범인 군부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던만큼 수 치 고문으로서도 군부와 민심에 반해 로힝야족을 옹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 치 고문은 한발 더 나아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사법재판소(ICJ) 법정에서 로힝야족 집단학살 혐의를 부인했다. 미얀마 군부가 제소당한 사건이었기에 본인이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으나 그는 직접 변호인단을 이끌고 탄압행위를 변호했다. 군부와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미얀마군에 의해 수 천명의 로힝야족이 사망하고 75만명의 로힝야 난민이 쫓겨나 방글라데시 등을 전전하고 있는 가운데 수 치 고문의 행보에 세계는 ‘아웅 산 수 치의 몰락’이나 ‘야만성의 변호인’이란 비판을 쏟아냈다. 노벨 평화상을 박탈해야 한다는 비난까지 제기됐다. 외부 세계에선 그가 집권하면 미얀마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들의 실망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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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수 치 여사의 행보에 대해 “우선 수 치 고문과 민간정부가 군부를 견제할 충분한 역량을 갖춘다면 로힝야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두둔하기도 했다. 군부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여 나가기 위한 개헌 등 점진적인 변화를 위해선 군부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 군부정권에 의해 제정된 헌법은 국방·내무·국경경비 등 치안과 관련된 3개 부처의 수장을 군부가 맡고, 상·하원 의석의 25%를 군부에 할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75% 이상의 찬성표를 규정하고 있는 만큼 군부의 협조 없이는 개헌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렸던 수 치 고문이 전 세계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군부 끌어안기에 나섰으나 결국 군부는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부는 ‘부정선거’를 이유로 내세웠으나 그 배경에는 군부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내부 불만, 지난 총선에서 군부와 연계된 정당이 참패한 데 따른 위기의식이 있었다.
수 치 고문이 군부와 타협한 시점부터 쿠데타는 사실상 예견된 것이었다는 관측도 있다. 동남아시아 인권단체인 포시(FORSEA)의 공동 창립자인 마웅 자니는 이번 쿠데타는 계속해서 군부에 권한을 부여해 온 헌법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 치 고문 본인도 그 헌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해왔다”고 지적했다. 자니 사무총장은 “가슴 아픈 사실은 미얀마 군대가 국가 권력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군부는 수 치 고문에게 긴 목줄을 맸다. 만약 수 치 고문이 군부와의 공놀이를 허락 받는다면 이제 그들은 목줄을 더 짧게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수 치 고문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지속되고, 그의 당이 다시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며 미얀마 군부는 스스로 고안한 민간 통치에 대한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