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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중국은 왜 통일된 대륙 국가로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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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25. 17:51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39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 사이에는 충분히 인적, 물적 교류가 있었을 수 있다. 반면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무려 1500여 년 늦게 출현한 황하 문명에 관해 학계의 다수는 독자적 진화설을 주장한다. 특히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아종 베이징 원인(猿人)이 현대 중국인의 공동 조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중화민족"의 독자성을 강조하려는 중국공산당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 지구인의 35%가 중국인이나 인도인인 이유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지구본을 살살 돌리면서 나지막이 미도가 물었다.

"통계상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82억명 중에서 인도와 중국인의 비중이 35%에 달합니다. 세 명 중 한 명 이상이 중국인이나 인도인입니다. 유엔 회원국이 193개국에 달하고 바티칸시와 팔레스타인국을 치면 195개인데, 전 세계 인구의 35% 이상이 왜 하필 중국이나 인도에 살아가게 되었을까요? 지구 위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의 총면적에서 이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12.4%에 불과한데 말이죠. 195개 국가의 규모가 어떻게 이리도 들쑥날쑥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나요?"

정당한 세계사적 의문이다. 총인구가 7억5000만명이 못 되는 유럽에 현재 44개의 국가가 존재하는데, 유럽보다 인구가 거의 2배나 많은 중국과 인도는 단일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유럽과 달리 중국과 인도가 거대한 통일 국가로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관해 학자들은 지리, 문화, 정치, 경제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설명을 내놓았다. 그 복잡다단한 설명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큰 강을 끼고 펼쳐지는 광활한 평야에 대규모 농경 사회가 생겨나면서 풍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하는 군주에 의해 여러 지역의 정치적 대통합이 이뤄질 수 있었다는 정도의 대서사로 귀결된다. 제목을 붙이자면 제국 서사(empire narrative)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상(商)나라 후기 은허(殷墟)의 갑골문(甲骨文)
상(商)나라 후기 은허(殷墟)의 갑골문(甲骨文)
중국을 돌아보면, 기원전 221년 진(秦)이 약 250년 약육강식의 살벌한 침략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국 시대의 대혼란을 종식하고 통일 제국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정치적으로 통합된 단일 왕조의 시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인도 역시 기원전 321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대략 기원전 340~297)가 정치·군사적 통일을 달성함으로써 최초로 통일 제국의 시기로 들어간다. 문제는 왜 하필 중국과 인도만이 장구한 세월 한 덩어리의 커다란 대륙 국가로 존속될 수 있는가이다. 과연 중국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나의 통일 정부를 갖게 되었을까? 크게 여섯 지역으로 나뉘는 거대한 아(亞)대륙(subcontinent) 인도는 또 무슨 이유로 하나의 정부 아래서 정치적 통합을 이루게 되었을까? 이 지구 위에 살아가는 인류의 35%는 왜 하필 인도인이거나 중국인이어야만 하는가?


◇ 한자가 은폐한 중화 문명의 언어적 다양성

사람들은 흔히 중국이 "뜻글자"인 한자(漢字)가 지역적 차이를 넘어 중화 문명의 문화적 통합을 가능하게 했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비학술적 추측일 뿐이다. 한자의 80% 이상은 소리와 뜻이 합쳐진 형성자(形聲字)이므로 단순한 뜻글자라 할 수도 없다. 게다가 한문(漢文)은 수십 년 익혀야만 능숙하게 쓸 수 있는 문언문(文言文)이다. 전통 시대 중국에서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 미만에 불과했다.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지식계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듯 한문 역시 식자층에 한정된 고문(古文)일 뿐이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라틴어를 사용해서 소통할 수 있었지만, 수백 개 봉건 영지로 쪼개져 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서 출토된 병마용(兵馬俑)
중국사 최초의 통일왕조를 연 진시황(秦始皇)의 무덤에서 출토된 병마용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지식계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듯 전통 시대 중국에서 한문은 식자층에 한정된 고문(古文)일 뿐이었다. 한자가 중국의 문화적 통일에 기여했음을 인정하더라도 한자 덕분에 중국이 정치적 통일을 이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문자뿐만 아니라 구어까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도 정치적으로 분열된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각 지역의 언어적 다양성은 실로 놀랍다. 현재 중국에 300여 개의 방언(方言)이 존재한다. 여기서 방언이란 단순한 사투리가 아니라 언어학적으로 외국어에 가까운 별개 언어들이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언어 통일 정책으로 방언의 사용이 줄어드는 추세이긴 하나 중국이 다언어, 다민족 사회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한자가 중국의 통일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지역적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 언어로서 전국적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단 지방어의 독자적 표기를 막았기 때문이라 볼 수밖에 없다. 로마자로 표기하면 독립적 언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중국의 수백 개 지방어들은 한자로 표기될 수 없었기에 그저 방언(方言)이나 사투리 정도로 취급받았다. 한자는 중화 문명의 언어적 다양성을 은폐했고, 그 점은 중국의 정치적 통일에 보탬이 됐을 수 있다.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 여러 지역에서 포교를 시작할 때 지방민들은 표준어라 여겨졌던 관화(官話, Mandarin)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황급히 각 지방 언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계발했다. 포교를 위해선 지방민들이 일상에서 쓰는 언어를 파고드는 게 가장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부터 광동어(廣東語), 복건어(福建語), 민남어(閔南語) 등의 로마자 표기법이 완성되어 성경 완역본이 나올 수준에 이르렀다. 로마자로 표기된 각 지방 언어는 단순한 방언이 아니라 각기 성경을 완역할 수 있을 만큼 언어학적으로 완벽한 고유언어임이 분명하다. 한자가 아니라 로마자로 표기했다면 중국의 지방어는 독자적 문자 체계를 갖춘 완벽하게 독자적인 언어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 중화 제국의 통일성을 설명하려면…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서유럽은 낱낱이 분열되어 봉건 시대로 돌입했다. 마찬가지로 한(漢) 제국 붕괴 이후 중국 역시 350년 이상 정치적 분열기로 들어섰다. 그런데 유럽과 달리 중국에선 수(隋)가 다시 통일 제국을 완성한 이후 무려 1500년 가까이 통일 왕조를 이어갔다. 당 제국 멸망 이후 50여 년의 분열기를 겪고, 이족의 침입으로 영토의 절반을 상실하기도 했지만, 그 넓은 땅은 대체로 통일된 상태였다. 특히 만주족이 세운 청(淸) 제국은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아니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영토를 이어받았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은 14억 인구가 공산당 일당의 지배 아래 놓인 통일적 대륙 국가가 되어 있다.

어떤 이는 유교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유교만으로는 중국 역사에서 황제 중심의 통일 왕조가 유지된 까닭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다. 로마 제국에서 시작된 유럽의 기독교화는 중세 1000년 동안 강력하게 지속됐지만, 유럽은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자도 유교도 아니라면, 다시금 문명의 태동기로 돌아가서 더 깊은 원인을 찾아볼 수밖에 없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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