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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조셉 스탈린: 야누스(Janus) 같은 두 얼굴의 리더십(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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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25. 17:51

강성학 웹용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1940년 5월 10일, 완전히 의회의 신임을 상실한 체임벌린이 영국의 수상직을 사임하고 윈스턴 처칠이 수상이 되었다. 영국의 뎅크에르의 철수작전 뒤에 스탈린은 발트해의 3국을 장악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2주 후에 프랑스는 독일에게 항복했고 스탈린은 대담하게 루마니아를 침공했다. 이제 스탈린은 사적으로 자신의 증가하는 불쾌감을 표현한 히틀러와 자기 사이에 두터운 영토적 쿠션을 마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1941년 3월,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기대여법(the Lend-Lease Act)에 서명하자 스탈린은 갑자기 스스로 수상직과 동시에 붉은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는 것으로 반응했다. 전쟁의 파도가 아주 불확실하자 그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번개 같은 속도로 움직이기 위해서 총체적 권력과 지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지금부터 외국의 외교관들과 개인적으로 직접 우호적인 조약들을 협상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의 첫 협상은 모스크바에서 유고슬라비아 대사와 가진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 대사가 그 협상이 독일인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자 "올 테면 오라지!"라며 스탈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9일 후 그와 일본의 마쓰오카(Matsuoka)외상은 만일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일본의 중립을 약속하고 만일 일본이 미국과 전쟁에 들어가면 러시아가 중립을 약속하는 조약을 협상했다. 스탈린은 마쓰오카를 직접 환송하기 위해 철도역에 나타남으로써 모스크바의 외교관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때쯤 히틀러는 스탈린의 모호한 이중거래에 분노로 가득했다.
이탈리아의 군사력을 무시했던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소련의 군사력도 무시한 히틀러에게 스탈린은 더 이상 인내력을 발휘할 기분이 아니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그가 필요로 하는 러시아의 식량과 원자재에 대한 대금을 더 이상 러시아에 지불할 수 없었다. 폴란드의 새 나치-소련 국경선에 독일의 약 150개 사단을 집중시키면서 히틀러는 러시아에 대한 전쟁인 바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준비했다. 히틀러는 그 작전이 러시아를 신속하게 파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국의 정보국은 독일의 바바로사 작전에 관해, 특히 6월 22일이라는 날짜까지 알아냈다. 4월 말에 처칠은 이미 영국의 맨소니 이든(Anthony Eden) 외상을 통해 스탈린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칠은 후에 스탈린을 '냉담하고, 교활하며, 그리고 잘 모르는 거인'이라고 묘사했다.

1941년 6월 22일 러시아인들은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기습공격 했다는 긴급소식에 경악했다. 처칠의 경고가 옳았다는 것에 놀란 스탈린은 크레믈린에 있는 자기 서재에 4일 동안 처박혀서 생각에 몰두했다. 그는 유럽의 무서운 장기 게임에서 마침내 지고 말았다. 히틀러가 공격한 지 11일 만에 공식적 침묵을 깨면서 스탈린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기 인민들에게 단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땅과 모국을 방어하는 애국적 러시아인으로서 침공에 저항하라고 호소했다.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은 1812년 나폴레옹이 침공한 바로 그날 6월 22일에 그리고 동일한 네만(Neman)강에서 시작했다. 24시간 내에 소련은 1200대의 항공기를 잃었는데 그 가운데 800대는 지상에서 잃었다. 스탈린은 7월 3일 방송에서 러시아 인민들에게 붉은 군대가 반격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치군대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무자비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초토화 작전을 명령했다. 적은 모두 전멸되어야 했다. 그가 과거 차르에 대항하여 사용했던 동일한 방법들을 요구하는 것이 옛 볼셰비크인 스탈린의 성격이었다. 처칠은 나치스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간이나 국가는 모두 영국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7월 12일 영-러 동맹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되고 양국은 러시아가 제1차 대전 때 했던 것처럼 서로가 별개의 평화조약을 맺지 않는다고 서약하면서 독일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총체적 상호원조를 약속했다. 스탈린은 이제 서유럽의 공식 동맹이 되었다.

스탈린은 조건을 가리지 않고 서방의 군사적 도움이 절실했다. 우크라이나가 히틀러에 신속하게 굴복하자 스탈린은 명백히 경악했다.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은 침공하는 나치를 정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 맞이했다. 그들은 여전히 집단농장화의 유혈기간 동안에 일으킨 농민들의 대학살에 대해 크레믈린의 지배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40만명의 붉은 군대 농민들이 나치군 편으로 탈영했다. 러시아의 규율은 주로 러시아 병사들의 등 뒤에 겨눈 소련 정보장교들의 총알이었다. 한동안 스탈린은 혁명의 가능성을 염려했다. 그는 모든 개인용 라디오들을 몰수했고 민간인 반역자로 의심되는 자는 누구든 즉결 처형했다.

1941년 9월 10일 나치스의 전격전은 90일간 계속된 레닌그라드의 포위로 절정에 달했다. 그 봉쇄된 도시에서 거의 100만명의 러시아인들이 기아와 폭격으로 죽었다. 각각 5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양측에서 하루의 전투에서 사라졌다. 스탈린은 인터뷰에서 담담하게 '한 개인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그러나 100만명의 죽음은 통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10월에 나치스는 모스크바의 근교에 도달했으며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이 도망쳤다. 히틀러는 공산주의가 파괴되었다는 표시로 크레믈린을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크레믈린을 떠나지 않았다. 만일 독일인들이 말살전쟁을 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얻을 것이라고 스탈린은 불타올랐다. 스탈린은 러시아의 정교회장인 세르게이와 합의를 서명하면서 정교회의 축복을 모색했다. 그것으로 러시아에서 모든 반종교적 활동이 멈추었다. 스탈린의 모스크바 방어는 동맹국들의 큰 칭송을 일으켰다. 그는 처칠의 칭송을 받았으며 서방에서 새로운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군 공급품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인상적인 양으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후 코민테른은 미국의 공산당에게 즉시 명령했으며 그후 공산당은 즉시 '파업'을 '일하라'라는 슬로건으로 대체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일본과 독일에 대항하여 참전하게 되었을 때 스탈린은 담담하게 기뻐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세계의 가장 큰 자본주의 국가가 세계의 가장 큰 공산주의 국가의 동맹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1942년 5월 몰로토프 외상을 런던과 워싱턴으로 보내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 압력을 줄이고 동과 서 양쪽에서 나치를 분쇄하기 위해 그 해에 프랑스에 제2의 전선을 열어줄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에 대한 공격의 절정은 양측이 결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풍부한 식량과 산업자원의 핵심지인 스탈린그라드에서 왔다. 히틀러는 만일 그가 스탈린그라드를 얻지 못하면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스탈린도 스탈린그라드를 전쟁의 결정적 전투로 만들 결심이었다. 나치는 1942년 8월 21일에 공격을 시작하여 1943년 2월까지 계속했다. 그 작전의 둘째 날에 단 하룻밤 공습으로 4만명의 러시아인들을 죽였다. 이 비참한 전투 중에 엄청난 격려가 러시아의 전선을 휩쓸었다. 미국의 전차와 항공기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스탈린의 인민들은 나치를 경악시킬 흉포함으로 싸웠다. 그들의 선택은 죽느냐 사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였다. 그들의 결사적 용기가 스탈린그라드의 방어를 제2차 세계대전의 위대한 영웅적 서사시의 하나로 만들었다.

1942년 11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의 지휘하에 동맹군이 북아프리카에 착륙했을 때 스탈린이 그것은 서 방측이 약속한 제2의 전선이 아니라 붉은 군대에게 약간의 안도감을 주는 작전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특징지었다. 스탈린은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집중했다. 그 전쟁의 애국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정보장교단 제도를 폐지했다. '프라우다'가 '군인은 사회주의적 의무가 전혀 없다. 그의 일은 단지 자신의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자기의 조국에 봉사하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1943년 1월 31일 독일 침략군의 프리드리히 폰 파울루스 (Friedrich von Paulus) 장군이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1만1000여 명의 병사들과 함께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의 공포스러운 시련이 마침내 끝이 났다.

스탈린그라드의 전투의 승리가 전쟁의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전환점이었다. 그때까지 전쟁의 결과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이제 이니셔티브는 서방 동맹국으로 넘어갔다.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동맹국들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발표했다. 자기의 파트너들에 대한 선의의 제스처로 4월에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체했다. 그 해 여름에 스탈린은 공세를 시작하여 나치의 손에 넘어간 소련 영토의 3분의 2를 회복했다. 이제 스탈린의 별은 소련의 하늘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서 그보다 더 높게 치솟고 그리고 보다 더 밝게 빛난 적이 결코 없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그들의 전쟁 노력과 평화계획을 통일하기 위해서 그해 말에 세 거두(a Big Three)가 테헤란에서 회담을 개최할 긴급한 필요성에 동의했다.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자기가 스탈린을 개인적으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루스벨트의 순진한 오산이었다.

1944년 6월 6일, D-Day에 마침내 스탈린이 그렇게 고대하던 유럽에서 제2의 전선이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실현되었다. 6월 10일과 8월 15일 사이에 러시아의 여름 공세가 붉은 군대를 동프러시아의 국경선에 다다르게 하자 스탈린은 붉은 군대에 의해서 해방되고 있는 동유럽의 정치적 미래에 대해 자신과 서방 사이에 투쟁이 형성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소련의 국경선에 더 이상 어떤 서방 지향적인 정부를 관용하지 않을 결심이었다. 더 중요하게도 그는 동유럽을 승리의 전리품으로 간주했다. 만일 그가 이 국가들의 풍부한 자원을 이용할 수 있다면 그들을 전후 소련 제국의 공산 식민지로 만들어 전쟁으로 파괴된 러시아가 신속하게 회복될 것이다.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로 진격하자 폴란드의 반공지하세력이 러시아의 지배를 막기 위해서 봉기를 일으켜 그 도시를 장악했다. 그들은 붉은 군대의 진입 이전에 독일인들의 도망에 의존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사단병력들이 비스툴라(the Vistula)강에서 격퇴되었다. 바르샤바에 있는 독일인들이 폴란드인들의 봉기를 분쇄하고 야만스럽게 그 도시의 가옥들을 파괴하여 복수했다. 런던과 워싱턴은 포위된 폴란드인들에게 보급품을 공급하기 위해 러시아의 공군기지의 이용을 원했지만 스탈린이 일거에 거절하고 자신의 보급품을 실은 항공기들을 불타는 도시 위로 보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경악한 서방의 지도자들은 그 비극에 대해 폴란드인들에 대한 스탈린의 냉혹함을 사적으로 책망했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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