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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산불 대응, ‘제승방략’에서 ‘진관체제’로 전환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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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5. 29. 14:48

고기연 한국산불학회장
고기연 한국산불학회장·전 산림청 산림항공본부장
조선시대 국방 전략을 돌아보면, 중앙이 직접 지휘하고 병력을 집결시켜 일시에 대응하던 제승방략(制勝方略)과, 지역 단위로 병력을 분산하여 평시에도 자체 방어가 가능했던 진관체제(鎭管體制)라는 두 가지 큰 축이 존재했다.

제승방략은 명령 계통이 명확하고 작전을 통합하기 유리했지만, 초기 기습에 대한 즉각적 대응이 어려웠고, 지형과 여건에 익숙하지 않은 중앙 지휘관이 현장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반면 진관체제는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수령이 병력을 운용하며 상시 방비하는 방식이었기에, 예측하기 어려운 국지적 침입에는 훨씬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산불 대응 체계의 방향을 재고하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현재 우리의 산불 대응은 상당 부분 중앙의 판단과 지휘에 의존하고 있다. 기술과 정보가 발전하면서, 전국의 산불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여건은 나아졌지만, 그와 동시에 현장의 판단권과 초동 대응의 자율성이 위축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산불은 무엇보다 초기 대응이 결정적인 재난이다. 그 지역의 바람 방향과 경사도, 연료 조건과 지역 동원력은 시·군·구 단위에서 먼저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판단과 조치가 상부에 의존해 지체될 경우, 상황은 급속히 악화될 수 있다. 최근 몇 해 동안의 산불 현장에서도 그런 흐름이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렇다고 중앙의 책임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산불과 같은 재난을 체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선언은 자주 공표된다. 다만 그 책임의 방식은 모든 것을 중앙이 직접 지휘하고 실행하겠다는 접근이 아니라, 현장과 지방정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과 기술을 적시에 지원하고, 전략적 조율을 담당하는 역할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방정부, 특히 시장, 군수와 구청장이 산불 발생 초기부터 상황을 종합 판단하고, 자원을 배치하며, 지역 단위의 통제권을 갖는 구조의 회복이다. 중앙은 그 위에서 정보를 연계하고, 위험 예측 시스템을 강화하며, 다부처 간 협업을 통해 정책의 방향을 조정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산불은 현장에서 꺼야 한다. 멀리 떨어진 중앙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재난은 속도가 빠르고, 변수는 많다. 결국 위기 대응은 '신속한 판단'과 '현장의 유연성'에 달려 있으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진관체제'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기후위기 시대, 산불은 예외적 재난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방식을 바꿀 때다. 현장을 믿고, 현장에 권한을 부여하자.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현장 기반 산불관리 체계로 전환할 적기다. 산불 뿐만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주요 재난에서도 마찬가지로 고려되어야 할 원칙이다.

고기연 한국산불학회장·전 산림청 산림항공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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