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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년 4월 이자성(李自成, 1606~1645)의 반란군이 명 제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하고 순(順) 나라를 세웠다. 명의 숭정(崇禎) 황제는 반도(叛徒)의 손에 더럽혀질 처첩과 딸들을 손수 죽이고 자금성 북쪽의 경산에 올라 스스로 목을 맸다. 황제를 잃은 명나라의 장수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만리장성 밖의 만주족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그는 긴급히 산해관(山海關)의 문을 열어 국경에 결집한 청군을 북경으로 불러들였다. 만주 정예 기병대는 산해관을 통과하기 무섭게 이자성의 군대를 분쇄했다. 이자성은 혼비백산하여 서안으로 달아났고, 청군은 반란군을 추격하면서 중원을 장악했다. 명의 반란군을 진압한 청군은 만주로 돌아가는 대신 명의 영토를 통째로 삼켜 '팍스 만주리카(Pax Manchurica)'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만주족의 인구는 많아야 100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의 한 저명한 역사가 웨이크먼(Frederick Wakeman, Jr.)의 보수적 추산에 따르면, 고작 33만명 정도였다. 만주족은 대체 어떻게 33만에서 100만 정도의 작은 인구로 어떻게 그보다 최소 120배에서 많게는 300배나 더 많은 인구를 가진 명(明)을 통째로 정복하여 260여 년의 세월 동안 성공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을까? 청(淸) 제국의 성공적 지배는 전략적 유연성, 제도적 계승, 문화적 실용주의, 유교 통치 등등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군사적 팽창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명을 복속한 청 제국은 내중국(內中國, Inner China)의 통치에 머물지 않고 만주, 몽골, 칭하이, 신장, 티베트 등의 외중국(外中國, Outer China)을 병합하는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중국의 전체 역사에서 260년에 걸친 만주족의 지배는 내지(內地)와 외번(外藩)을 통합하여 새로운 중국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중국은 만주, 네이멍구, 신장, 칭하이, 티베트를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갖게 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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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거부가 재산을 증식하여 수백 년 된 오랜 건물을 매입했다 해도 과거 그 건물의 소유주들을 모두 자기 집안 사람으로 고쳐 쓰지는 않는다. 같은 이치로 한 나라가 새로운 영토를 병합해도 과거 그 땅의 역사를 자기 나라 역사의 일부로 삼을 수 없다. 그럼에도 중국의 역사가들은 중국사를 논할 때 오늘날 중국의 영토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명 제국이 몰락하던 17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외번의 여러 지역의 중국에 속하지 않았지만 18세기 말에 이르면 그 모든 지역이 중국의 일부가 되었다. 영토가 무려 두 배나 확장되었다. 그 결과 중국의 역사가들은 만주, 몽골, 신장, 티베트의 고대사까지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해서 기술한다. 중국의 정통 왕조사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면서 외번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할 때 발생하는 웃지 못할 아이러니다. 그런 논리적 역설을 감추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은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요구에 부응하여 중국의 역사가들은 티베트, 신장, 만주, 대만 등의 고래로 중국사의 일부였다고 태연자약 주장한다. 지금은 소수 의견이 되었지만, 1950~60년대 중국 고고학자들은 베이징 원인(猿人)을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라 주장했다. 중국공산당은 소위 중화민족을 마치 하나의 종족처럼 규합하기 위해 바로 그러한 비역사적 역사 기술을 정치 이념으로 삼는다.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장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먀오족까지 모두 중화민족이라면 대체 그때의 '민족'이란 무슨 의미인가? 유럽에서 일어난 근대 민족주의가 중국에 와서 가장 극단적인 허구적 민족의식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중화민족은 중국 전 영토에 살아가는 모든 종족과 집단은 물론 해외에 살고 있는 화교 동포들까지 아우르는 인위적 개념이다. 그런 인위적 개념을 역사 기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비역사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가들은 하·은·주 삼대에서 진·한 제국을 거쳐 당·송·원·명
·청으로 이어지는 왕조사를 중국사의 정통 계보로 삼는다. 다른 한편 그들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병합된 외번의 여러 지역을 중국사의 일부로 포함해서 기술한다. 특히 최근까지도 신장, 티베트, 대만 등 영토 분쟁의 소지를 갖는 지역에 대한 이의제기는 중국의 "핵심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중국사 기술의 가장 큰 논리적 난제는 바로 '중국'이라는 개념적 모호성에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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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司馬遷) 이래 중국의 정통 역사가들은 황하 유역 중원에서 발원한 문명이 중국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전통적 역사관을 정설로 채택했다. 사마천의 그러한 주장은 삼황오제(三皇五帝)와 요(堯)·순(舜)·우(禹)·탕(湯) 등 태고의 성왕이 문명을 만들어서 짐승처럼 살아가던 야만 상태의 여러 부족을 교화했다는 유가(儒家) 경전상의 역사 기술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한 전통적 역사의식에 따르면 중화 문명은 출발점부터 단일한 기원을 갖는 단선적인 민족사였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역사의식은 실증적 기반은 빈약했음에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학계는 중원의 양사오(仰韶)문화 유적을 중화 문명의 출발점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변방으로 문화가 퍼져나갔다는 가설은 중국 전 지역의 모든 인구가 실은 중원에서 발원했다는 가설을 강화했기 때문에 국민적 통일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제고하려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1990년대부터 중국의 고고학계에선 그와 상반되는 다원 문화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고대 중국에선 다양한 지역에 여러 신석기 문화가 비슷한 시기에 생겨나서 지역적 상호 작용을 통해서 발전해 갔다는 학설이었다.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여러 발굴 성과에 힘입어 선사(先史) 시대 황하 유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동시적으로 여러 신석기 문명이 활달하게 꽃폈다는 점을 증명했다. 몇 가지 대표적 문화만 열거하자면, 장강 유역의 허무두(河姆渡), 마자빈(馬家濱), 량주(良渚) 문화, 동북 지역의 훙산(紅山) 문화, 쓰촨 지역의 바오둔(寶墩), 산싱두이(三星堆) 문화, 북서 지역의 마자요, 치자(齊家) 문화 등등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는 중화 문명이 단일 기원설을 부정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중국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신석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생겨나서 꽃폈기 때문이다.
전통적 일원 문화 학설에 도전하는 중국 고고학계의 다원 문화 학설은 한족 중심의 일방적·단선적 확산설을 부정하는 다원적, 포용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다원 문화 학설의 함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중화 문명이란 중원에서 다른 지역으로 확장된 단일 문명이 아니라 여러 지역 다양한 종족이 함께 참여하여 만든 인류 공동의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는 중국공산당으로선 다원 문화론의 정치적 함의가 탐탁할 리 없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 국가가 하나의 국가로 남기 위해선 통일 정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설파해야 하는데, 현대 고고학의 성과가 여러 지역 문화의 고대적 기원을 증빙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재윤 맥마스터 대학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