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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관한 전기 영화로는 '불멸의 연인'과 '카핑 베토벤'을 꼽을 수 있겠다. 두 작품 모두 당연하게도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전자는 성대한 공연장 오케스트라 옆에 서있는 베토벤, 그리고 그가 유년시절부터 꿈꿔왔던 세상을 회상하는 장면과 함께 교차편집으로 그려져 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쳐 나와, 홀로 호수 위에 떠있는 어린 베토벤 위로 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린다. 에이리얼 쇼트로 공중에서 바라본, 호수에 반사된 별들의 무리 속, 물위에 어떤 영혼보다도 자유롭게 부유해 있는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존엄한 하나의 별자리이자 우주다. 형언하기 어려운 이 아름다운 장면은 주변의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게 하는 힘이 있다.
후자의 경우는, 합일과 교감의 정서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귀가 먹어 지휘를 할 수 없는 베토벤은, 무대 아래서 악보를 해석하여 지휘를 하고 있는 '악보 카피스트' 안나를 보며 지휘를 한다.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악필로 적은 악보를 연주용으로 필사하는 고용인 안나, 그녀의 지휘를 보고 지휘봉을 휘젓는 베토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카피한다. 그러면서 서로를 보완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을 돕는 안나. 천재적 재능을 가졌으나 여성이란 이유로, 작곡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안나를 베토벤은 알아보고 그녀의 성장을 돕는다.
한편 두 작품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평민성'이다. 영화 불멸 연인의 이야기 전개는 베토벤이 진정 사랑한 연인이 과연 누구인가를 쫓아간다. 그런데 그 정점엔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수많은 귀부인 그리고 아리따운 어린 연인과 염문을 뿌렸던 베토벤은 정작 평민 출신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후원하는 스폰서에게도 굽실대지 않았던 도도한 베토벤이 마음속에 깊이 숨겨둔 진정한 불멸의 연인은 놀랍게도 그의 형수였다.
물론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이다. 사실 베토벤은 죽은 형이 남긴 조카의 양육권을 두고 그의 형수와 법정 다툼까지 벌일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그럼에도 영화에선 그런 형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설정 하에 극을 끌어 나간다. 형수를 사랑한 베토벤, 패륜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진정 사랑했던 이는 평민이다. 이는 당대 귀족 체제를 타파하려 했던 시대정신이 베토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는 상징이다. 그게 바로 평민성이다.
'카핑 베토벤'의 안나 역시 마찬가지다. 극 중 가공의 인물, 안나는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녀는 악필(惡筆) 악보를 연주용으로 필사해 주는 고용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는 안나와 베토벤이 교감을 이루는 과정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간다. 이로써 카핑 베토벤 역시 당대 시대정신을 노래한다. 앙시앵 레짐(구체제)으로서 귀족사회를 상징한 연인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평민이었던 베토벤이 역시 마찬가지로 평민인 여성을 흠모하고 교감하는 캐릭터를 배치함으로써 주제를 보다 분명히 한다.
사실 교향곡 9번 4악장의 형식은 매우 구조적이다. 4악장의 시작은 1, 2, 3악장의 주제를 짧게 들려주곤 이내 곧바로 부정한다. 이어서 생명력이 꿈틀대는 환희의 송가 모티브를 세 번 들려주다가 다시 곡 첫 부분의 혼란스러운 연주로 돌아간다. 이와 같은 오케스트라의 서주를 지나선, 느닷없이 베이스 독창자가 일어나 "오, 벗이여! 이런 곡조는 아니오! 더 즐겁고 환희에 찬 곡조를 노래합시다!"라고 일갈한다. 그러곤 강한 인상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아주 단조로운 평민의 선율'로, 모두 하나 되어 따라 부를 수 있는 예의 환희의 송가 모티브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음악의 향연을 통과하며 비로소 거대한 합일을 이뤄 나간다. 이로써 하나가 된 청중은 '모든 평등한 인간의 연대'로서 인류애에 동참하게 된다.
지난 3년간 처참하게 무너진 경제로 중산층은 붕괴되고 서민은 고충 받고 있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로서 중산층 의식' 조차 불가능해진 고통스러운 시절을 관통하고 있다.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이제 누구보다도 서민과 함께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 정말로 서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평민성의 철학'을 견지한 정책을 간절히 기대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