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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 한국의 ‘달리’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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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06. 12. 14:03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
시류 거스른 외로운 화가들 재조명...7월 6일까지
김종남 나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재일조선인 화가 김종남(마나베 히데오)의 '나의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초현실주의 태동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한국에서도 잊힌 초현실주의 화가들을 재조명하는 의미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관에서 선보이고 있는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전은 그간 한국 미술사에서 소외됐던 6명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을 중심으로 43명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재일조선인 화가 김종남(마나베 히데오)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빽빽한 식물들 사이로 기이한 생명체들이 숨바꼭질하듯 숨어있는 그의 그림은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연상시킨다.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차별의 아픔이 화폭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작가는 임종을 앞두고서야 두 아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임을 밝혔다고 한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일반인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에게도 낯선 이름들"이라며 "7년간 전시를 준비하며 발굴한 작가들로, 추상미술이나 민중미술이 주류였던 한국 화단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초현실주의 세계를 구축해온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초현실주의1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 곳곳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각각 다른 사연을 품고 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 김욱규의 작품에서는 1·4후퇴 때 가족을 북에 두고 월남한 이산의 아픔이 느껴진다. 미군 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는 1970년대부터 창작에 전념하며 4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생전에는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았다.

전시의 또 다른 백미는 김종하와 박광호의 작품들이다. 한국 미술계가 전통의 현대화나 민족 정체성 탐구에 매달릴 때, 이들은 개인의 내밀한 욕망과 에로틱한 환상을 과감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김종하는 사막과 숲을 여성의 신체로 표현했고, 박광호는 석회동굴 속 종유석과 구형 오브제들을 반복해 성적 욕망을 드러냈다.

김영환 자화상 풍경
김영환의 '자화상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김영환과 신영헌의 작품에서는 살바도르 달리나 조르조 데 키리코 같은 서구 초현실주의 거장들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특히 신영헌은 달리의 이중 이미지 기법을 활용해 전쟁과 분단을 겪은 한국의 산천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시킨 독특한 작품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 감상을 넘어 한국 미술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의미가 크다. 그동안 추상미술과 민중미술 중심으로 서술되던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소외됐던 초현실주의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발굴, 소개하여 미술사를 보다 다채롭게 바라보고자 기획된 전시"라며 "초현실주의를 매개로 한국근대미술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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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100년 전 앙드레 브르통이 꿈꾸었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초현실주의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현대인들에게 꿈과 환상의 세계를 제시하는 초현실주의의 매력은 시대를 초월한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한국 근현대미술사가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풍성하고 다층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묵묵히 구축해온 이들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준다. 전시는 7월 6일까지.

황규백 분홍색 손수건과 달걀
황규백의 '분홍색 손수건과 달걀'. /국립현대미술관
전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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