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주제로 한 연극제에서 만나는 가족의 또 다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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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마더'는 배우 허부영이 직접 연출과 출연을 맡았으며, 이선구, 오태은, 오현철, 허현정, 양예송이 함께 무대를 꾸민다. 극은 새로운 가족을 꾸리기 위해 분투하는 한 여성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싱글 대디인 남편과 재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녀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낯선 곳에 둥지를 틀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현실은 쉽지 않다. 아이의 양육도, 남편과의 관계도 이상하게 빗겨나간다.
그녀의 위안은 윗집에 사는 '민준이 할머니'다. 노인의 다정한 말벗은 일상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유일한 쉼표가 된다. 하지만 어느 날, 할머니가 사실은 아이 돌봄을 위한 도우미 로봇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사랑받는 존재라 믿었던 인물이 '기능적 역할'로서 설계된 인공물이었다는 사실은, 그녀의 감정과 기억 모두를 송두리째 흔든다. 더불어 남편의 또 다른 비밀까지 드러나며, 그녀가 믿고 쌓아온 '가족'이라는 구조는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이 작품의 핵심은 로봇이라는 도구를 통해 바라본 인간관계의 조건부성이다. 연출자 허부영은 "로봇이 엄마, 할머니, 집사로 기능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쉽게 버려지는 존재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을 위로하는 존재로 설계된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성을 되묻게 만든다는 역설. 이 안에서 극은 '돌봄'의 본질, '가족'이라는 개념의 유효성을 비판적으로 되짚는다.
특히 '인스턴트 마더'는 "편리함"과 "효율"이라는 말로 정당화되는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소외되고 대상화될 수 있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엄마라는 이름조차 인스턴트 식품처럼 소비되고 교체될 수 있다는 세계. 여기서 드러나는 허위의 가족서사와 위선은, 현대 사회의 감정 노동과 돌봄 구조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히 풍자와 비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다운 관계란 무엇인지, '진짜' 엄마란 누구인지, 우리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감정의 실체는 무엇인지?그 근원적인 물음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감정과 기능, 존재와 쓰임, 사랑과 설계 사이의 간극을 탐색하며, 관객 스스로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게 만든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 대한민국치유예술제는 올해로 5회를 맞는 예술치유 페스티벌로, 한국임상연극심리치료협회가 주최한다. '가족, 마음으로 잇다'를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정서적 치유와 사회적 연대를 예술로 실천하고자 하는 시도다. 연극, 음악극, 무용극, 참여형 워크숍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이 마련되었고, 예술인뿐 아니라 발달장애인, 청소년, 직장인 등 다양한 참가자들이 예술의 주체로 무대에 선다.
'인스턴트 마더'는 이 치유예술제의 주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가족의 외형과 실체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정교하게 짚어내며, 기술 사회 속에서의 돌봄과 소외,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조명한다. 이는 단지 위로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와 관계의 회복을 모색하는 '예술의 손길'과도 맞닿는다.
이번 치유예술제에서는 이 외에도 ▲브레멘음악대-만석을 향한 하모니 ▲지극히 평범한 ▲빛은 그 자리에 ▲절레절레 동화 ▲개 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코델리아 바리데기 등 총 8편의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공연 예매는 티켓링크를 통해 가능하며, 관람료는 작품별로 상이하다.
'인스턴트 마더'는 오는 6월 18일 오후 4시와 7시 30분, 삼일로창고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된다. 이 시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정의하고 싶은 이들에게, 그리고 인간다움의 회복을 예술로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무대는 묵직한 질문과 조용한 위로를 동시에 건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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