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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오사카, 자이니치 청춘의 기억을 무대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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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6. 19. 16:23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 연극 '장소'
조선학교에서 자란 한 자이니치 소년의 기억과 정체성을 그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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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제46회 서울연극제 공식 선정작으로 소개되는 연극 '장소'가 오는 20일부터 29일까지 서울씨어터 202에서 관객과 만난다. 극단 불의전차가 제작하고 김철의 작가가 대본을 쓴 이 작품은 1980년대 일본 오사카 조선고급학교를 배경으로 한 청춘 서사이자, 자이니치(재일조선인) 정체성을 둘러싼 역사적 기억을 무대 위에 풀어낸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89년, 일본이 버블경제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던 시기다. 외견상으로는 번영의 시기였지만, 조선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에게는 그 풍요가 결코 온전히 닿지 않았다. 연극은 조선학교 신입생 '현장소'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학교 안의 강한 규율과 위계,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형성된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장소는 갈등과 혼란을 겪으며 점차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싸움'은 학교 안에서 중요한 규범이자 일종의 문화로 작용한다. 친구들을 지키기 위한 몸싸움은 공동체 내부에서 존중받는 방식이었고, 학생들은 이를 통해 자신을 단련하고 서로를 지지한다. 그러나 장소는 그 속에서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며, 집단의 논리와 개인의 감정 사이에서 방황한다. 작품은 이러한 내적 균열을 무대 위에 조용히 펼쳐 보인다.

작가 김철의는 이 작품이 자신의 청춘 시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는 "자이니치가 100년의 역사를 살아왔지만, 그 이야기를 다룬 연극은 많지 않다"며, 자이니치의 삶과 기억이 무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특정 민족이나 공동체의 것에 그치지 않고, 성장과 실패, 갈등과 화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담고 있기에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청춘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무대 위에는 장소의 학교 생활뿐 아니라, 점차 희미해져 가는 민족의 기억도 병치된다. 민족기악부실에 흐르는 가야금 소리, 복도와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우정과 다툼, 교문 앞에서 벌어지는 충돌 등은 하나의 청춘기를 구성하는 장면이자 사라져 가는 공간의 흔적이다. 작가는 "이제는 사라진 조선고급학교의 풍경이 배우들의 몸을 통해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며, 연극이 지닌 재현의 힘을 강조한다.

작품은 또한 '치마저고리 사건'과 같은 실제 역사의 맥락을 간접적으로 상기시킨다. 1980년대 후반, 조선학교 여학생들이 민족복장을 이유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됐던 사건들은 단지 과거의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연극은 이 사건들을 정면으로 다루기보다는, 그 시대를 살아간 청소년들이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서로를 보호했는지를 조심스럽게 비추며, 정체성과 연대의 문제를 오늘의 시선에서 되새기도록 유도한다.

'장소'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현장소(유희제)를 비롯해 류선화(박주희), 장군성(장태민), 김원도(정명군)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결을 보여준다. 배우들은 조선학교 학생, 일본 학생, 민족기악부원 등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무대 위에 입체적인 장면을 구현한다. 연출은 변영진이 맡았으며, 무대디자인(이승희), 조명(노명준), 음향(공한식), 움직임 지도(김설진) 등 제작진 또한 당시의 분위기를 구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번 공연은 서울연극협회와 극단 불의전차가 공동 주최하고, 서울문화재단과 서울연극창작센터 등의 후원으로 진행된다. 연극제라는 축제의 장 속에서 '장소'는 과거와 현재, 특정한 민족적 경험과 보편적인 청춘의 정서를 교차시키는 지점을 탐색한다.

무대 위에서 질문하는 장소의 목소리는 단순히 한 개인의 내면에 머물지 않는다. "나는 누구로 남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조용한 울림을 전한다. 사라져가는 장소의 기억이 연극이라는 예술 형식을 통해 다시 떠오르는 순간,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시절, 그 자리, 그리고 지금 이곳의 '장소'를 함께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서울연극제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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