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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전쟁과 문명, 고대 그리스의 흥망성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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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8. 24. 17:10

외계인에 들려주는 지구인의 세계사 <51회>
송재윤
송재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 문명은 철학, 문학, 신화, 예술, 정치제도 등 모든 면에서 서양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 서양 문명이 보편적 인류 문명을 이끌어가는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그리스 문명은 인류 문명사의 중요한 한 축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서양철학사, 서양음악사, 서양미술사, 서양건축사 등은 대부분 고대 그리스 문명을 제1장으로 삼는다. 그런 책들만 보면 고대 그리스의 현실이 화려한 문화 예술과 심오한 철학 사상이 꽃피던 장기적 평화의 시기로 여겨지겠지만, 실제로 그 역사는 험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 전쟁과 고대 그리스 문명

고대 그리스 문명의 흥망성쇠는 호모 푸그난스(Homo Pugnans, 투쟁하는 인간)가 빚어낸 장쾌하고도 비극적인 대서사를 보여준다. 역사가들은 그 대서사를 흔히 세 개의 큰 전쟁으로 풀어낸다. 최초의 동서양 대결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9-449), 두 동맹으로 양분된 그리스 세계가 30년 가까이 치른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 그리고 북그리스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기원전 335-323)이 그것이다. 전쟁이 그리스 문명을 만들었고, 그리스 문명은 끊임없이 전쟁에 휘말렸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고대 폴리스의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전 인류가 함께 누리는 고전 문명을 만들었다.

기원전 5세기 질그릇
기원전 5세기 질그릇. 그리스 병사가 페르시아 군인과 싸우는 장면.
과연 고대 그리스에서 어떻게 그리도 찬란한 고전 문명이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 비밀을 푸는 첫 열쇠는 바다를 끼고 펼쳐지는 비좁은 산악 지형에 놓여 있다. 발칸 반도의 농사짓는 마을들은 대체로 촘촘한 산악에 막혀 있었으며, 주변 바다는 무수한 섬들이 이어지는 다도해(多島海)였다. 덕분에 그리스는 한 나라로 합쳐지지 못한 채 수백 개의 독립된 폴리스(Poleis, 도시국가)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에 실제로 존재했던 158개 폴리스의 헌법들을 직접 구해서 각 도시국가의 정치제도와 행정조직을 경험적으로 탐구한 후 '정치학'을 집필했다. 제각기 다른 제도와 문화를 유지한 채 공존하던 도시국가들은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인접한 국가들 사이에선 수많은 전쟁이 발생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체육, 예술, 논쟁 등 모든 방면에서 개개인의 아레테(arete, 우수성)를 드러내기 위해선 공정하게 실력을 겨루는 시합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고대 올림픽을 탄생시킨 그리스 특유의 경합적(agonistic) 문화는 주변국과 긴장 상태에서 공존해야만 했던 폴리스를 빼고선 설명할 수 없다.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살려주는 소크라테스
기원전 432년 포티다이아 전투에서 알키비아데스를 살려주는 소크라테스. 18세기 판화.
◇ 수백 개 식민지를 개척한 고대 그리스인들

산악 지형에 막혀 내륙으로 농지를 넓힐 수 없었던 그리스인들은 인구가 늘어서 폴리스의 삶이 각박해지자 지중해 바닷길로 뻗어나갔다. 기원전 8세기 초부터 대략 300년에 걸쳐 그들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 흑해 유역, 이탈리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 일대에까지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했다. 편의상 식민지라 부를 뿐, 실제로는 모국의 통치를 전혀 받지 않는 독립적인 폴리스에 가까웠다.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한편 여러 지역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수백 개 식민지를 개척할 만큼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그리스인들이었지만, 정치적 통합엔 완강히 저항했다. 그들은 페르시아처럼 통일 제국을 이루기보단 제각기 고유의 전통을 가진 독립적 도시국가로 남아 있으려 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는 중국의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다대다(多對多)의 전쟁 상태에 놓여 있었다. 수백 개의 폴리스 하나하나가 그리스 문명을 꽃피운 독립적 단위였으나 끊임없는 경쟁, 공포, 전쟁을 일으킨 구조적 결함이었던 셈이다. 수백 개 폴리스로 구성돼 있던 그리스 세계도 외적의 침략 앞에선 뭉치지 않을 수 없었다.

50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벌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공동체를 탄생시켰으나 페르시아군이 패주한 후 수십 년 평화가 이어지자 다시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가 여러 폴리스로부터 방위비를 징수하여 더욱 부강해지자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새로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27년간 지속된 이 전쟁 속으로 거의 모든 폴리스가 휘말려 들어갔다.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는 대규모 해상전과 농지까지 초토화하는 잔인한 포위전은 그리스 전 지역을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갔다. "전쟁이 문명을 만들었고, 문명이 전쟁을 일으켰다." 고대 그리스 문명사는 바로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의 탄생

외계인 미도가 물었다.

"모든 지구인이 철학자는 아니겠지만, 모든 철학자는 지구인입니다. 서양철학사 교과서를 보면, 철학의 어원은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os)이라던데요. 처음엔 그저 지구인의 DNA엔 지혜를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라 생각했는데, 이후 여러 책을 들추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세 차례나 장갑 보병(hoplite)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소크라테스가 거쳐 갔을 전투 경험은 진정 그의 철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군인으로서 소크라테스가 겪었던 무시무시한 살육전의 체험은 과연 어떻게 그를 지혜를 사랑하는 철인으로 거듭나게 했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시민군(citizen-soldier)으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나아가 싸웠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으로 확인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플라톤은 '변명'이나 '심포지엄' 같은 저술에서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웠음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플라톤과 함께 소크라테스 문하에서 공부했던 크세노폰(기원전 430-354) 역시 전쟁터에서 그의 스승이 싸우는 장면을 묘사했다. 그러한 기록 속에서 그려진 소크라테스는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인내력과 따뜻한 인간애를 겸비한 모범적인 군인의 모습이다.

오늘날 근대문명의 출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서양철학(Western Philosophy)의 아버지 소크라테스는 세 차례나 전투에서 직접 싸웠던 한 명의 군인이었다. 참혹한 전쟁의 체험이 그를 치열한 철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전쟁의 악순환에 빠진 폴리스의 근원적 위기를 분석하고, 끝없는 투쟁의 구렁텅이에 빠진 인간군상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사상 투쟁을 전개했던 논리의 전사였다. 몸소 전쟁을 겪었기에 그는 평화를 희망했다. 인간 본성의 투쟁성을 직시했기에 그는 평화의 조건을 궁구했다. 그리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당대의 현학자들과 치열한 사상전을 벌였다. 평화를 쟁취하려면 정의의 담론과 진리의 토론에서 승리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사상전에 뛰어든 소크라테스는 한 치의 굽힘도 없이 용감하고도 치열하게 싸웠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그의 논리에 매료되었다. 그 결과 그는 신성을 모독하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정에 세워졌다. 아테네 시민들로 구성된 500명의 배심원은 그의 유죄를 인정했고, 결국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셔야만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전쟁으로 얼룩진 그 당시 그리스 사회의 폭력과 광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군사적 긴장 상태와 전쟁 과정을 빼고선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명을 논할 수 없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바로 그 점을 웅변한다.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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