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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의사이자 통계학자인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은 한마디로 어떤 현상이나 주장에 대해 본능적, 즉자적 반응보다는 비판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적 사고의 기반은 데이터라고 명확히 말한다.
로스링이 이 책을 쓴 때는 2016년이다(그는 2017년 2월 사망했고, 공동집필하던 가족들이 마무리해 2018년 출간했다). 그해 11월,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점잖게 표현했지만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 호소가 더 먹히는, 말하자면 거짓말이 난무한 한 해였다는 뜻이다. 브렉시트 투표(2016년 6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2016년 11월)과 관련해 탈진실의 사용빈도가 급증(전년 대비 2000% 증가)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브렉시트 투표과정에선 근거 없는 찬반 주장들이, 미 대선에선 트럼프 후보의 거짓말 여부가 분위기를 주도했었다. 탈진실 현상은 전 지구적이었다. 그가 서문에서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으로 (사실충실성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밝힌 것은 사실상 이런 현상에 대한 걱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상황은 좀 개선됐을까. 세상은 더욱 빨라졌고, 촘촘히 이어졌으며, 정보 소비 사이클은 짧아졌고, 즉자적 반응이 사람들의 관심을 훨씬 끌어당긴다. 우리 정치, 사회 곳곳에서 이런 현상이 목격된다. 국회의원들의 정책과 비전 제시보다는 몇 초짜리 짤(짧은 동영상)이 훨씬 더 유권자들의 관심을 끈다. 인터넷에는 자극적 제목의 기사가 판을 친다. SNS는 단편적·즉자적 반응이 정보 소비 구조에 훨씬 유리하다. 그러니 맥락도 없고, 아니면 말고 식이다.
진실하지 않은 것은 거의 단일함, 단순함의 특징을 갖고 있다. 단순함은 묘한 마력이 있다. 명쾌하고 깔끔하다. 구심점의 상징이 되고, 대중이 은근히 바라는 강한 리더십의 이미지마저 갖고 있다. 무엇보다 복잡한 현상을 단일한 문제로 규정하며, 단일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머리에 쏙 들어온다. 시쳇말로 쿨한 데다 능력까지 있어 보인다. 쾌도난마의 통쾌함에 크게 끌리는 경향도 있다.
질 좋은 일자리 만든다고 어느 날 갑자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해준다. 집값이 오르니 대출을 죄고 전세 기한을 강제한다. 의료 문제가 쌓이고 쌓이니 의대 정원을 갑자기 두 배로 늘리면 해결된다고 한다. 건설 현장 부조리에 대한 원성이 높으니 건설폭력배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단속한다.
그렇다고 질 좋은 일자리가 늘었으며 집값이 안정됐는가. 의료 문제가 해결되고 건설 현장 문제가 잡혔나. 그 결과가 어떻고, 그 여파가 어떻게 미치고 있는지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모든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명확히 말했다.
이런 현상의 기저에는 문제의 단순화, 단일 해결책 제시라는 악순환이 있다. 모든 것이 복잡하게 연결된 세상에 단일한 해결책이란 건 없다. 망상에 가깝다. 단일과 단순함이 정치와 결합할 때 질 낮은 선동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인류 역사에서 그런 끔찍한 경험은 적지 않다.
인간은 늘 착각이나 오류, 편견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비판적 사고를 해야 하는데 누구도 그것을 쉽게 하지 못한다. 자기 하는 일에 바쁘고, 무엇보다 '생각하는 것'은 강도 높게 에너지를 쓰는 작업이다. 그런 귀찮고 힘겨운 일을 누군가(또는 어떤 프로그램이) 대신해서 단순하게 정리하고, 단일한 관점을 만들어 주며,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다면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마치 먹기 싫은 쓴 약을 달달한 당의정으로 만들어 물과 함께 주는 것과 같다. 선동은 사실과 주장을 교묘히 섞어 하나의 큰 사실, 정보, 뉴스로 만든다. 사실 1에 주장 9(근거가 있든 없든)를 섞어 하나의 단일한 사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받아먹기 좋은 당의정을 턱밑에까지 갖다준 게다.
정보나 소식을 접하고 즉시 받아들이기보다 근거를 점검하고, 관련 데이터를 살펴보며, 맥락과 추세를 확인하는 것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객관화·일반화할 수 있는 것인가 가늠해 보는 작업이다. 우리의 일상사는 보고 들은 것을 늘 평가, 분석, 전망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의 핵심은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는 것이다.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는 힘, 즉 분별력이 약해지면 선동에 취약하다. 효과도 없는, 오히려 해가 되는 당의정을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이익을 내줄 수밖에 없다. 나라 안과 밖에서 들려오는 정보나 뉴스를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기초체력이 필요한 때다.
김명호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창간 때부터 국민일보에 30여 년 재직하며 정치부장, 워싱턴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 겸 논설실장을 지냈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석좌교수로 강의했으며, 현재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로 활동 중이다.
김명호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초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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