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상충 조정 안 되는 '통치해체' 수준
동맹의 자원도 강탈하는 '착취 국가화'
미국 의존도 줄이는 새 국가전략 짜야
|
지난 2022년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우리 기업이 반도체와 배터리 공장 건설에 착수했을 때부터 미국에 제조업 기반을 마련하는 데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최대 난관은 인력난과 고임금이었다. 숙련 기술자가 턱없이 부족했고 임금은 너무 높았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미국 내 제조업 생태계가 무너진 지 오래돼서인지 정밀 장비 설치 작업을 할 인력이 없었다. 고급 용접 기술자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단순 건설 인력도 한국보다 임금이 보통 3~4배 높았다. 게다가 인플레이션과 환율 상승(원화 약세)으로 자재 및 인건비가 날이 갈수록 뛰었다. 그나마 바이든 행정부는 첨단 제조 기업이 미국에 공장을 건설할 경우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하는 유인(incentive)을 내걸었다. 상생(win-win)의 자세는 최소한 갖추고 있었다. 이번에 트럼프 정부가 '불법'이라고 문제 삼은 전자여행허가(ESTA) 또는 단기 상용(B-1) 비자를 통한 한국 기술자의 미국 단기 출장을 관행적으로 묵인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보조금 지급 등 바이든 행정부의 약속을 깡그리 뒤엎은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지난 4월2일 소위 '미국 해방의 날'을 선언한 트럼프에게 우방이나 외국 제조 기업은 상생의 파트너이기는커녕 미국의 노동자, 농민, 장인들의 일자리를 훔쳐가고 공장을 약탈한 사기꾼, 청소동물(scavenger)이다.
지난달 말 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한국 기업들이 추가로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금액이 1500억 달러(약 208조원)에 이른다. 대미 수출 외국 기업을 '일자리 도둑'이라며 압박하는 트럼프 정부의 등살에 울며 겨자 먹기로 투자 금액을 늘린 측면이 있다. 이렇게 쥐어짜고 또 짜서 투자 규모를 늘렸더니 돌아온 게 헬리콥터와 군용차량까지 동원한 한국인 근로자 체포다.
사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 기업의 비자 문제에 전향적인 발언을 했다며 비자 제도 개선에 대한 낙관론이 나온다.
하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이번 사건이 국토안보부가 책임진 '불법이민 단속'이라는 목표와 상무부·재무부가 담당하는 '대미 투자 극대화+제조업 회복'이라는 정책 목표 간 충돌 때문이라는 분석은 맞다. 하지만 이처럼 모순되고 상충되는 정책이 조정되지 않고 지속되는 게 트럼프 시대 미국의 뉴노멀(새 표준)이다. 트럼프가 한국에 전문직 비자 쿼터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더라도 의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될지도 의문이다. '미국인 일자리가 아니라 외국인 일자리를 챙기느냐'는 시위 몇 번이면 대다수 의원들이 입법을 포기할 것이다. 이와 관련, 러셀 뮤어헤드 다트머스대학 교수 등은 최근 출간한 '통치해체(Ungoverning)'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 역량의 종합적이고 의도적인 파괴를 획책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일관성 있고 통합적인, 가장 효율적인 정부를 가진 미국은 이미 과거가 됐다.
구금된 근로자들은 자진 출국이든, 추방이든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 기업은 물론 미국 투자를 결정한 다른 외국 기업, 그리고 우리 정부도 이번 사태가 제기한 근본적 질문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떨쳐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회사의 막대한 자원을 이처럼 불안정하고 불확실성투성이인 미국에 투자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이다.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해외 기업 유치 정책을 트럼프가 뒤집었듯이 다음 대통령이 트럼프 정부 시기의 협정을 무효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니,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도 관세 및 여타 통상정책이 얼마나 많이 변화할지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해 통상정책을 총괄하는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가 지난 8월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트럼프 시대 보호무역체제를 '트럼프 라운드'라고 지칭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1947년 조인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은 우루과이 라운드를 거쳐 1993년 12월 세계무역기구(WTO)로 전환됐다. WTO체제를 탄생시킨 우루과이 라운드는 7년 간 8차례의 지난한 협상을 거쳤다. 트럼프 라운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트럼프 정부의 통상전략가들이 앞으로도 계속 미국 입맛에 맞게 통상규칙을 바꿔갈 것임을 시사한다.
이러한 미국 통상정책의 유동성과 악명 높은 트럼프 개인의 변덕이 결합돼 대미 투자의 불투명성은 한껏 올라간다. 게다가 트럼프는 정치 경제 군사 외교 등 모든 수단을 사용해 우방이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해당 국가의 자원을 미국으로 이전하는 '착취 강대국(extractive superpower)'의 민낯을 본격화했다.
이런 미국에 대응해 다른 선진국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유럽연합(EU)은 그동안 주저했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적극 추진한다. 한국도 미국 일변도 투자의 리스크를 줄이는 국가전략을 짜야 한다. CPTPP 가입은 상수다. 미·중 등 강대국 중심에서 벗어나 글로벌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도국을 통칭)와의 정치·경제적 연대의 폭과 강도를 심화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