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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트럼프 대통령의 신중상주의(Neo-Mercantilism): 견제해야할까 아니면 편승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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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9. 1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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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 이후 최근까지 국제관계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FDR) 대통령이 추구했던 국제평화와 안전을 위한 소위 국제적 다자주의를 꾸준히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다. 이런 과정은 동시에 국제적 자유무역의 지속적인 확대를 통해 세계자유무역체제(WTO)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때 '세계화'라는 국제적 상호의존시대를 구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헤게모니가 점점 상대적으로 쇠락하게 되었다. 1990년대 소련공산제국의 몰락과 냉전에서 미국의 승리는 한동안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는 국제적 단극체제(the unipolar system)를 이루었고 심지어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국제정치적 투쟁이 사라진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서히 단극체제에서 미국에 도전하는 강대국들의 정책으로 인해 국제체제는 곧 국제적 다극체제(the multipolar system)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에 지구는 더욱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이었다. 마치 날벼락 맞은 것처럼 국제경제질서가 국제정치의 본질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즉, 국제적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이 더 이상 그런 국제적 다극화 추세와 국제자유무역질서를 보고만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접어들어 미국에서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우선주의 정책으로 돌아가면서 미국의 전통인 예외주의(exceptionalism)와 일방주의(unilateralism)가 국제정치를 압도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이 그동안 타국, 특히 동맹국들의 ATM 기계였다고 자책하면서 그 결과 쇠퇴한 '미국을 다시 위대한 나라(MAGA)'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특히 미국의 제2기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 국제적 자유무역체제를 일방적으로 뒤엎고 거의 모든 국가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강력한 미국보호무역정책을 실시했다. 이제 국제관계는 마치 18세기의 중상주의(mercantilism)로 복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8세기의 중상주의와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미국의 이러한 일방적 관세폭탄에 대해 어떤 타국도 그에 상응하는 관세로 보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세계는 여전히 미국이 국제적 단극체제를 이끌고 있었다. 트럼프는 미국이 거의 250여 년 전 미국의 국부들이 꿈꾸었던 새 로마(New Rome)임을 '분명하고 명백하게(clear and distinct)'하려고 하고 있다. 18세기의 국제적 중상주의는 국제관계를 위험으로 이끌었다. 그것은 끝없이 치열한 경쟁과 갈등, 그리고 종국에는 국가 간 전쟁으로 비화했었다.

이제 트럼프가 시작한 국제적 신중상주의도 국가 간 새로운 갈등을 끝없이 유발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국가들도 트럼프 행정부처럼 자국의 생존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서슴없이 채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제관계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상호 간 민감성이 높고 동시에 취약성도 깊다. 그리하여 머지 않아 아비규환 국제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 간 경제를 넘어 노골적인 정치적 투쟁이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여전히 전후 국제적 다자주의가 20세기 말에 도달한 깊은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세계화는 세계인들의 삶의 양식이 되었다. 물론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들의 우화에서처럼 서로 다른 학문들은 세계화를 다르게 정의한다. 그러나 핵심적 의미는 지구상의 사방팔방으로 무제한적 통상의 확산이다. 즉, 세계화는 경제적 세계화, 즉 자본주의의 확장과 같은 단일 차원에서 주로 이해되고 있다. 세계화는 지난 몇십 년간 전 세계에 걸쳐 소위 발전도상국에서 시장의 '규제의 철폐'를 진작시켜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세계화를 반대하던 사람들이나 집단들은 근대 민족국가의 핵심적 특징인 국가의 주권적 독립과 자율성을 옹호하고 또 내세웠다. 그들은 경제적 세계화에 정치적 국가독립으로 맞섰다. 그러면서도 세계화의 탈근대국가와 사회의 편안한 삶과 모든 인간적 가치들을 최고의 수준으로 향유하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들은 근대적 사회들이 겪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근대화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 오직 탈(脫)근대적 가치만을 향유하기를 기대한다.

이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반세계화 투사들에겐 세계화란 바로 미국화를 의미했다. 그래서 세계화는 타도해야 할 괴물로 간주되었다. 미국화는 지구상의 소중한 문화적 다양성과 고귀한 전통의 고유함을 말살하기 때문에 타도하고 또 막아야 한다고 절규하면서 그들은 무한정 투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세계화는 단순한 미국화의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전(全)지구적 규모와 차원의 인간상호연계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화는 비록 우리가 그것의 포위망을 최근까지 잘 의식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인간들의 역동성으로 인해 항상 인류와 함께 있었다. 고대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세계시민' 정신에서 출발하여 르네상스 이후 범(凡)세계주의 혹은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 자유 평등과 함께 프랑스 대혁명의 대의명분이 된 박애주의 사상, 1970년대부터 유행한 '지구촌(global village)', 그리고 국제적 상호의존(international interdependence)시대라는 세계화와 비슷한 용어들은 늘 인류와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용어들은 늘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우리는 세계를 문명이나, 종교, 민족, 인종, 이념과 같은 색안경을 통해 협소하게 세상을 보았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 그런 세계관이 인간들의 상호연계와 역동성에 대한 전(全)지구적 의식의 발전과 실천을 계속해서 좌절시키고 또 지연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과거에 세계화는 근대화를 통한 통상과 기술혁신과 함께 무력에 의한 정복의 결과였다. 그리고 대제국은 한때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세계화는 물리적 정복에 의한 강요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보다 편리한 삶과 물질적 욕구충족의 기대를 매개로 하는 보다 설득력 있는 '유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이것을 소위 연성권력(soft power)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 정보기술혁명은 그런 유혹의 힘을 보다 민주화된 세계에서 거의 누구에게나 만연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 시대 세계화의 아주 독특한 특징일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세계화는 이 세상 모든 사회의 역사적 성격과 국가의 상대적 지위를 변화시킬 다차원적 과정으로 더 적절하게 해석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탈(脫)국경적 형태의 삶의 증가뿐만 아니라 복수의 충성대상의 발전을 진작시켰다. 지구상의 소위 세계화주의자들은 보편적 인권과 일할 권리, 환경의 지구적 보호 및 지구상 빈곤의 과감한 축소 등이 범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세계정부가 없는 세상에서 '권력이나 매력'이 아니라 인도주의, 즉 '동정심'을 통해 세계화의 지구적 관리가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동정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지금 새로운 점이 있다면 아무리 지리적으로 먼 곳에서 발생하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도 우리가 안방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거의 동시간적으로 생생하게 목격한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 정보혁명의 덕택으로 방송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인간들의 고통은 사실상 거의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서도 전지구상의 슬픔을 리모컨 버튼을 누르는 우리의 손가락을 통해 손쉽게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지구적 동정심이나 사해동포주의적 공감이 '민족적' 혹은 '애국적'인 국내적 연민이나 공감을 대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오해가 될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모든 것이 방영된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든지 채널을 바꾸거나 아예 꺼 버릴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은 전형적인 뉴스프로그램의 리듬을 경험하고 있다. 즉 심각한 문제들의 방영 뒤엔 스포츠 소식이나 일기, 생활정보와 연예인들의 활동과 온갖 오락용 소식을 함께 전한다. 따라서 헤드라인 뉴스로 고통스러운 소식이 우리의 동정심과 연민을 일으킨다고 해도 거의 모든 시청자들은 곧 마음의 안정을 갈구하는 소비사회의 일상적 관심 속으로 젖어 들고 만다.

일찍이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오셀로(Othello)'에서 코스모폴리탄 인간과 정치공동체 간의 조화로운 삶의 궁극적 어려움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 후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간파했듯이 동정심의 정치란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동정심이란 연약한 것, 특히 자국의 국경선 밖에서는 아주 나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해동포주의에 믿음을 주지 않았다. 동정심이나 공감에 관해서 논할 때 우리는 '인도주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 연민의 정치란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아주 옛적에 플라톤이 이미 경고했듯이 타인에 대한 연민은 곧 자기중심적으로 쉽게 변질되어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강화해서 오히려 타인에게 무정하게 만들게 된다. 니체는 연민이 남들을 판단할 능력을 앗아간 뒤 인간들을 가련하게 버려두는 영혼의 결함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연민의 초점이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계급을 희생자로 전환시킬 때 소위 억압자들에게 대항하는 가혹한 잔인함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정치공동체, 즉 국가는 경제 문제로 단순히 축소될 수 없다. 정치적 문제들과 이익, 그리고 동기들은 그 자체의 진실성과 리듬을 갖는다. 범세계적 통상은 상호 이익과 공동시장, 그리고 서로 이익이 되는 통상의 협정을 창조한다.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자본주의의 통상은 본질적으로 국가횡단적(transnational)이고 전(全)지구적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새 중산주의의 도래가 세계화의 종말을 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그런 것들은 정치가 아니다. 정치가들과 외교관들로 하여금 권력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인민들의 다양한 정치공동체 혹은 현저히 경쟁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를 칼 슈미트(Carl Schmitt)의 유명한 표현대로 '동지와 적(friend and foe)'의 관계로 간주하게 하는 정치의 분할이다. 경제적 이익이란 그것이 특정 공동체의 권력, 생존, 그리고 안녕에 기여하는 정도만큼만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가들과 외교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정치가와 외교관의 정치적 동기들은 유발 징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지하에 있지만 주된 경제적 결정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이제 국가 간 무역갈등으로 인해 국가 간 정치적 투쟁이 빈번해질 것이다. 트럼프의 패권적 신중상주의는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을 견제하는 진영과 미국에 편승하는 국가들의 진영으로 분할될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늘 미국에 편승해 왔다. 이제 트럼프가 구축하려는 새 아메리카-로마(America-Rome)의 패권질서를 견제(balancing)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그것에 편승(bandwagoning)할 것인가? 바로 그 선택에 대한민국이 국가적 '번영' 아니면 국가적 '몰락'으로 갈 것인지 미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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