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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 전국시대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는 230년부터 221년까지 불과 9년여 만에 한(韓), 조(趙), 위(魏), 초(楚)를 무너뜨리고 위(魏), 제(齊)까지 아울러 급기야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뤘다.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통일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247년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진왕(秦王) 영정이 채택한 법가(法家) 사상에 주목한다. 성왕(聖王) 통치와 주공(周公)의 예제(禮制)를 복원하려 했던 유생(儒生)들과는 달리 법가 사상가들은 통일 제국의 출현을 내다보고 중앙집권적 관료 행정 체제를 설계했던 당대(當代)의 근대화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시효를 다한 주(周) 왕조의 봉건제도를 폐기하고, 군현제로 전 영토로 재편하라 요구했다. 진왕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감한 법가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엄격한 형률(刑律)과 공정한 법제로 대민 지배를 강화하고, 중농 정책 위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설명의 밑바탕엔 통일 제국의 출현이 역사 발전의 필연적 과정이라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
기원전 221년 진 제국의 출현에서 1912년 청 제국의 멸망까지 전통 시대 중화 제국의 국가이성(國家理性, Raison d'Etat)은 천하통일(天下統一)과 제세안민(濟世安民)이었다. 제국의 붕괴는 지역적 분열을 낳고, 분열은 전쟁을 일으키며, 전쟁은 사회 혼란과 민생 파탄을 불러온다는 경험칙에 근거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표현만 바꿨을 뿐 실제로는 천하통일과 제세안민을 국가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진시황이 천하통일을 내걸었듯, 중국공산당 총서기 시진핑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치고 있다. 14억 인구가 공산당 일당의 지배 아래 놓인 오늘의 현실은 진시황이 구축했던 제국적 통제의 완결판이다. 중화 제국의 역사는 2200년 동안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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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대륙에 출현한 진·한 제국과 지중해 연안에서 일어선 헬레니즘 제국과 로마 제국의 형성 과정엔 상당한 유사점이 보인다. 진 제국의 출현보다 대략 100년쯤 앞서 지중해 발칸반도에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일어나서 유럽,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인도까지 연결하는 거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다. 진 제국이 15년 만에 무너졌듯이 헬레니즘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사망 후 여러 왕국으로 분열됐다. 진 제국은 비록 단명했으나 진시황이 도입했던 중앙집권적 제국의 기본 틀은 곧이어 등장한 한 제국으로 계승되었다.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무너졌으나 정복 군주로서 그가 구상했던 세계 제국의 청사진은 거의 300년 지나 로마제국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과연 어떻게 일개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고 세계 제국으로 웅비할 수 있었을까?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수수께끼만큼이나 풀기 어려운 역사학의 최대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비단 현대 역사가들만의 문제의식이 아니다.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이전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했을 때,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Polybius, 기원전 203~120?)는 바로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대체 어떻게 이탈리아반도의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전광석화처럼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폴리비오스는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 '히스토리아'를 썼다. 이 책은 기원전 220년에서 146년까지의 주요 사건을 다뤘지만, 그의 관심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던 기원전 220년부터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정복하던 167년까지 53년 동안에 집중돼 있었다. 시작은 미약했던 로마가 창대한 세계 제국으로 거듭났던 비결을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로마가 빠르게 일어선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폴리비오스는 우선 로마의 군사력과 군사 작전에 주목했다. 로마의 군대는 전쟁 발생 시 군역을 지는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폴리비오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평생에 걸쳐서 최대 16차례, 기병의 경우엔 최대 10차례 전쟁에 불려 갈 수 있었다. 물론 기원전 107년 마리우스 군제 개혁 이후 로마군은 직업 군인제로 변해갔지만, 폴리비오스는 그 과정을 보지는 못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시민들로 구성된 로마군은 엄격한 훈련을 거쳐 기본적으로 강인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군법의 적용도 공평무사하여 로마군은 바싹 군기가 들어 있었다. 전과(戰果)에 따른 후한 포상과 실책에 대한 엄한 처벌은 명예심과 자긍심이 강한 로마 시민군을 강력하게 결속시켰다.
물론 군사적 강인함만으로는 로마의 대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폴리비오스는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행운(fortuna)을 누렸음을 지적한다. 다만 운이란 한순간에 왔다가 다음 순간 사라지는 가변적 형세에 불과하므로 로마의 장엄한 정복의 위업을 행운의 덕분이라 단정할 순 없다. 군사력이나 행운을 뺀다면, 과연 그 무엇이 로마의 욱일승천을 가능하게 한 비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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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역사가들이 진 제국이 맹렬하게 굴기했던 이유를 진시황의 법가 개혁에서 찾고 있듯, 폴리비오스는 동시대 로마의 흥기를 로마 나름의 독특한 제도에서 찾으려 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이탈리아반도 중앙의 작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은 기원전 5세기 이후 왕정을 폐기하고 300년 이상 쌓아 올린 공화정의 전통에 있었다.
폴리비오스는 자연 상태에서 짐승처럼 살던 사람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만나 문명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왕정이 생겨난다고 생각했다. 그 점에서 왕정은 자연스럽지만, 세습 군주제 아래에선 필연적으로 독재자가 출현하여 왕정의 실패를 초래하고 만다. 왕정이 실패하면 귀족층이 반발하여 독재자를 물리친 후 공동선을 추구하며 귀족정(aristocracy)을 실시하지만, 그 역시 얼마 못 가 탐욕과 부패에 찌든 추악한 권력층이 돼버리고 만다. 이에 민중이 들고일어나 권력을 탈취하고 민주정을 실현하지만, 그 역시 오래지나지 않아 폭민 정치와 군중 독재의 사슬에 말려들고 만다. 그렇게 왕정이 전제정으로 타락하고 귀족정이 과두정으로 부패하고 민주정이 무정부를 초래하는 난정(亂政)의 악순환이 불가피하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폴리비우스는 그리스를 비롯한 모든 국가에선 바로 이러한 정치의 악순환이 무한 반복되지만, 오직 로마인들만이 공화정을 통해서 타락과 부패의 연쇄 고리를 벗어났다고 극찬했다. 로마 공화정의 집정관, 원로원, 민회(民會)는 각각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지혜에서 생겨났다. 무엇보다 정부 각 부문의 권력을 분립시켜 상시적인 상호 견제로 세력 균형을 실현하는 로마 공화정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장점을 결합한 정치적 지혜의 금자탑이라 할 만하다.
로마 공화정을 칭송한 폴리비오스의 사상은 거의 2000년이 지나서도 근대 입헌주의 사상가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로마 공화제는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헌법적 기초가 되었다. 정반대로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념적 기원을 찾으려면 진시황의 법가 개혁으로 소급해야만 한다. 동서양을 가르는 이념적 분기는 과연 우연이었을까.
송재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