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외국인 노동자 대거 희생…산업안전·인권 과제 부각
솜방망이 처벌 논란 속 '무관용 원칙' 첫 사례로 제도 실효성 시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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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법 형사14부(고권홍 부장판사)는 23일 선고 공판에서 박 대표가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저버리고 불법 파견과 하청 구조 속에서 위험한 생산을 강행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사람의 생명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체로 존엄하고 보호받아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다는 점에서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중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20년보다는 낮아졌지만, 중처법 도입 이후 가장 무거운 실형이다.
아리셀의 실질적 경영 책임자가 아니라는 박 대표의 항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판부는 "비록 아들인 박중언 피고인이 아리셀의 실질적 업무를 했으나 아들로부터 주간보고를 받고 업무 관련 지시를 하는 등 중대재해처벌법에서 규정한 경영총괄책임자 지위가 인정된다"며 "입법 취지에 비춰 책임자에게 무거운 형사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솜방망이 처벌' 논란에 시달려온 중처법의 실효성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됐다. 지금까지 대부분 사건이 집행유예나 징역 1~3년 수준에 그친 상황에서, 이번 선고는 "더 이상 예외는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리셀 화재 희생자 23명 중 20명이 파견·외국인 노동자였다는 점도 판결의 무게를 더한다. 사고 당시 일부 대피문은 정규직만 출입할 수 있는 잠금장치로 막혀 있었고, 대피 경로에는 가벽까지 설치돼 피해를 키운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계는 이를 "안전보다 비용 절감을 앞세운 구조적 차별이 빚은 참사"라고 규정했다.
이재명 정부가 산업안전 강화와 외국인 노동자 인권 보호를 국정과제로 내세운 상황에서 이번 판결은 정책 기조와 맞물려 더욱 큰 상징성을 갖는다. 정부가 2030년까지 산재 사망률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공언한 만큼, 이번 선고는 노동현장 전반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란 평가다.
다만 향후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까지 남아 있어 최종 형량이 유지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법조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중처법 양형기준 마련 논의에 속도를 붙이고, 기업들의 안전투자 확대를 압박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노동법 전문 손익찬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법원이 경영 책임자의 책임을 명확히 인정한 사례"라며 "유가족들의 합의가 있었음에도 중형이 선고된 것은 기업의 산업재해 엄중히 처벌하겠다는 사법부의 강력한 메시지로도 읽힌다"고 밝혔다.
또다른 노동전문 김남석 변호사는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산업재해일수록 형량이 더 높아진다는 법원의 판단 기준이 확인된 셈"이라며 "중처법의 입법 취지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