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어둠 속에서 시작된 소리, 현실을 비추는 또 하나의 감옥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929010015977

글자크기

닫기

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9. 29. 18:30

연극 '공공공공' 리뷰
대사와 몸짓이 교차하며 빚어낸 상징의 긴장
동시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자유와 속박의 은유
01
연극 '공공공공'의 커튼콜 징면.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무대가 어둠에 잠기자 극장은 낯선 공기 속으로 빠져든다. 관객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극장 안을 메운다. 그것은 동물의 울음 같기도, 인간의 신음 같기도, 단순한 기계음 같기도 하다. 단정할 수 없는 그 음향은 객석을 불안하게 붙잡고, 시간이 늘어지는 동안 몇몇은 고개를 기울이며 그 출처를 짐작하려 애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모호한 소리는 시작부터 무대를 장식하는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질문처럼 다가왔다. '이 소리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우리가 듣고 있는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관객의 귓가에 맴돈다.

이윽고 인물들의 대사가 터져 나오며 이야기는 속도를 얻는다. 상황 설명이나 장식적인 장면으로 길을 여는 대신, '공공공공'은 불확실한 소리의 여운 위에서 곧바로 대사로 뛰어든다. 화려한 장식은 배제되고, 건조한 언어가 무대를 지배한다. 그 담백함 속에서 오히려 주제는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라는 반복된 물음은 이후 전개를 관통하며 연극 전체의 화두로 자리 잡는다.

02
연극 '공공공공'의 공연 징면. / 사진 극단 불
작품의 중심에는 감옥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놓인 인물들이 있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노인 무기수 '9000'은 오랜 세월 속에서 죄와 참회의 무게를 짊어진 채, 신에게 기도하고 자유와 속죄를 향한 절규를 이어가며 극의 축을 형성한다. 사교 교주 '666'은 사람들의 욕망과 불안을 파고드는 언설로 집단적 광기를 환기시키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는 태도를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낸다. 젊은 죄수 '1234'가 첫 대사를 내뱉는 순간, 단호한 어조와 날 선 눈빛에 객석의 시선이 꽂혔다. 그의 분노와 좌절은 무대 밖 공기까지 흔드는 듯했고, 불평등과 착취에 대한 날선 언어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했다.

주식 브로커 '317', 별칭 허수는 탐욕과 교활한 꾀로 점철된 인물로, 돈이 세상의 질서를 지배한다는 냉혹한 신념을 내세우며 감옥 안에서도 계산과 술수를 멈추지 않는다. 감옥의 질서를 쥐고 흔드는 간수 '북두칠성'은 권위와 통제를 앞세워 체제를 유지하지만, 동시에 권력이 지닌 부패와 모순을 드러내는 얼굴로 그려진다. 여기에 '하얀새'와 '검은새'가 언어 바깥의 상징적 존재로 등장해, 말보다 강렬한 이미지로 극의 바깥에서 긴장과 은유를 밀고 들어온다.

관객의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은 단순한 감옥의 풍경을 넘어섰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직장과 가족, 돈과 이념, 사랑과 증오라는 이름으로 재생산되는 또 다른 감옥을 비추는 은유다. 이는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경쟁을 강요하는 교육 제도, 성과 중심으로 압박하는 직장 문화, 가족 안에서조차 벗어나기 힘든 기대와 억압, 정치와 이념의 갈등으로 인한 분열까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모든 관계가 또 다른 감옥처럼 느껴진다.

배우들이 내뱉는 대사는 때로는 현실의 언어처럼 생생하고, 때로는 시적 비유로 치환되어 객석을 파고든다. 인물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궤도를 따라 흐르다가 어느 순간 서로의 목소리가 겹치고 충돌하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형성한다. 그 순간 감옥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오늘을 은유하는 상징적 무대로 변모한다. 관객은 무대 위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비추어보게 된다.

03
연극 '공공공공'의 공연 징면. / 사진 극단 불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전기광은 장식적인 요소를 최소화하고, 인물과 대사의 밀도로 무대를 이끌어간다. 배우들의 호흡은 이번 무대의 가장 확실한 힘이었다. 장두이는 노인의 체념과 침묵을 묵직하게 끌어안으며 극의 무게 중심을 붙잡고, 강희영은 사교 교주로 서사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주원성은 절제된 몸짓과 단단한 목소리로 감옥을 지배하는 체제의 얼굴을 선명히 구현했고, 황정후는 젊은 죄수의 분노와 불안을 날 선 언어와 에너지로 관객 앞에 던졌다. 김산은 탐욕과 허무 사이에서 흔들리는 허수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이 외면할 수 없는 오늘의 자화상을 형상화했다. 김수정이 연기한 '하얀새'는 무대에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언어 대신 몸짓과 시선, 그리고 말 없는 노래로 극의 공기를 흔들며, 김희정이 맡은 '검은새'는 춤의 움직임으로 대비를 이루어 상징적 긴장을 더욱 선명히 드러냈다.

무대 위에서 반복되는 대사와 침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과 해방, 고통과 욕망이 부딪히는 파동을 형성한다. 때로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겹쳐져 한꺼번에 쏟아지고, 때로는 침묵이 무대를 잠식하며 오히려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객석에서는 숨소리조차 줄어든 순간들이 이어졌고, 관객은 이 진폭 속에서 자신이 갇혀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을 떠올리게 된다. 연극은 바로 그 지점에서 현실과 무대를 겹쳐 보게 만든다.

작가 주수자는 시와 소설, 희곡을 넘나들며 언어와 이미지를 변주해온 문인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오랜 해외 유학을 거치며 예술적 감각을 넓혔고, 2001년 소설 '한국소설'로 등단했다. 희곡집 '빗소리 몽환도'와 '복제인간 1001'이 대학로 무대에서 공연되며 주목받았고, 'Night Picture of Rain Sound'와 'ZERO 공공공공'은 해외에서도 출간돼 호평을 얻었다. 2025년 장편소설 '소설 해례본을 찾아서'로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이번 무대에서도 서정성과 사회 비판적 시선을 교차시켜 시적 긴장과 서사적 밀도를 동시에 드러낸다.

04
연극 '공공공공'의 공연 징면. / 사진 극단 불
2021년 초연 이후 '공공공공'은 매해 무대에 오르며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해왔다. 당시에도 사회 구조의 모순과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새로운 해석과 변주를 거듭하며 관객과 호흡을 이어왔다. 2025년 이번 공연은 불안과 위기로 가득한 동시대 현실을 배경으로, 감옥과 자유라는 오래된 화두를 다시 묻는다는 점에서 무게가 크다. 청년 세대의 좌절, 끝없이 반복되는 노동·자본의 불평등, 분열과 혐오가 일상이 된 정치적 풍경은 모두 작품의 배경과 겹쳐진다. 감옥이라는 설정은 더 이상 허구적 장치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를 재현하는 은유로 다가온다.

연극은 결국 묻는다. "당신은 삶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포로입니까." 막이 내린 뒤 잠시 침묵이 흐른 객석의 분위기는, 그 질문이 단순한 대사가 아니라 관객을 따라붙는 울림임을 증명했다. 무대를 떠나 일상으로 돌아온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물음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극은 해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만든다. 바로 이 점에서 '공공공공'은 단순한 시대극이나 사회극을 넘어선다. 그것은 치열한 현실 인식이 담긴 보고서이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서정적 시선이 담긴 시적 텍스트다.

드림시어터 소극장에서 만난 이번 무대는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알 수 없는 소리로 시작해 침묵과 대사의 반복으로 쌓아올린 서사는, 결국 관객 각자의 삶에 겹쳐져 묵직한 울림을 남겼다. 감옥을 닮은 현실에서 자유를 향한 사유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공공공공'은 그 여정의 불씨를 다시금 우리 앞에 내놓고 있었다.
전형찬 선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