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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축구와 전쟁의 마력: 영광스러운 불확실성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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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0. 1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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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만일 여자들이 남편과 애인들에게 자신들을 거부하려 한다면 그들의 남자들은 침상의 즐거움과 전투장에서 아주 신나는 경험의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전쟁이 인간의 본능에 기인한다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즉, 인간들이란 원래 서로 싸우는 존재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싸우는 대신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싸우는 것을 중지할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 결과에 대해 그런 결론을 내릴 만큼 충분히 자기가 아테네의 남자들과 여자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인간들은 전쟁에서 희열을 느끼고 영웅들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핵시대에 인간들은 전쟁보다는 스포츠에 열광했다. 이것은 특히 유럽에서 축구경기의 열기 그리고 범세계적으로 월드컵 경기에 대한 열광을 보면서 인간들이 마침내 황홀경을 맛보기 위해 전쟁 대신에 축구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전쟁과 축구는 전통적으로 남자들의 영역이었다. 오랫동안 역사에서 영웅은 전쟁영웅을 의미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평화가 오랫동안 계속되자 남자들은 축구와 같은 경기에서 스타플레이어를 영웅시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손흥민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스타플레이어가 전쟁영웅 같은 국가적 영웅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까?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를 보면 그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월드컵 우승의 승리에 기여한 대표선수가 국가적 영웅으로 대접받기 때문이다. 만일 손흥민 선수가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다음 월드컵 경기에서 우승한다면 대한민국은 속된 말로 뒤집어지고 손흥민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영웅이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전쟁과 축구의 마력은 그 결과의 영광스러운 불확실성에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도 월드컵 경기에 거의 광신적이 되었다. 당시 불편한 경기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그 경기는 한동안 우리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모두가 축구를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경기를 본 다음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제정치도 축구처럼 감동적인 경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표출한다. 로마인들은 평화 시에 검투사들의 싸움을 즐겼다. 축구는 일종의 검투사들의 싸움에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그런 염원에 반응하듯 지구상의 국가들은 4년마다 치르는 월드컵에서의 승리에 열광하면서 이제는 축구의 유명 슈퍼스타들이 과거 전쟁영웅이나 차지했던 명예와 부를 누린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미식축구와 야구가 세계의 축구를 대신한다.

축구게임과 국제정치에서는 무엇보다도 다 같이 참가하는 참가선수들의 페어플레이를 기대한다는 가장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페어플레이 없이는 축구게임이나 국제정치가 시작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축구와 국제정치는 피상적으로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판이하게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축구는 경기에 참가하는 두 팀의 출전 선수가 균등하게 제한된 11명의 선수, 그리하여 총 22명의 선수만이 경기에 참가할 수 있지만 정치에는 무제한 사람들이 참가하여 북새통을 이룬다. 특히 전쟁의 경우에 동맹국의 참전 가능성은 정치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든다. 또한 축구장은 공간이 제한되어 있지만 전쟁은 동맹국들의 참전여부로 그 공간이 결코 제한되지 않는다.

둘째, 축구에는 모두가 준수하는 엄격히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국제법이란 그렇게 엄격하게 정해지지 않았다. 축구에서는 사용하는 수단이 발과 머리에 국한되어 있지만 전쟁에서 국가가 사용하는 수단은 육해공군의 모든 수단이 사용된다. 국가 간 전쟁에서 국제법은 엄격히 지켜지지 않는다. 전쟁은 거의 모든 폭력수단을 동원한다.

셋째, 축구경기에서는 참가국 팀에는 각 한 명의 독재자 같은 감독이 있지만 국제정치에서는 모두가 자칭 감독이다. 따라서 축구에서는 감독만이 전략을 정하지만 국제정치에선 전략과 전술이 훨씬 더 다양하고 수시로 변한다. 중구난방이라 일관된 전략이 존재할 수 없다. 감독은 일방적으로 무능한 선수를 교체하거나 퇴출시킬 수 있지만 국제정치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감독은 독재적 권한으로 각 선수들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그것이 지켜진다. 축구선수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득점이지만 국제정치에서는 승리와 패배 그리고 비기는 휴전의 세계이다.

넷째, 축구에도 국제정치에서처럼 강국으로 인정되는 소수의 국가들이 있지만 그 지위는 국제정치에서와는 달리 4년마다 쉽게 변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경기 결과의 최종적 불확실성(uncertainty)이 축구의 매력이요 열광의 원천인 것이다. 전쟁도 그 결과가 궁극적으로 불확실하다. 축구경기의 결과는 패자가 깨끗하게 승복하지만 국제정치투쟁의 패자는 잘 승복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다섯째, 축구경기에는 제3자인 신 같은 심판관이 있고 그가 규정을 해석하고 집행한다. 그리고 심판관의 판결은 번복되지 않는다. 국제정치에는 국제사법부가 있고 국제정치에는 유엔이 있지만 국제사법부는 정치에 개입을 원하지 않고 유엔은 무기력할 뿐이다. 심판관은 폭력적 저질 선수를 즉시 퇴장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경기 중에 참가 팀의 감독마저 퇴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국제사법부는 규칙 위반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유엔은 국제사회에서 국제법 침해국을 국제사회에서 응징하기 어렵다.

여섯째, 관중들은 함성으로 격렬한 응원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의 투표로 축구경기의 결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여론은 단순한 관중의 함성을 넘어 그 승패를 결정하는 투표권을 갖는다. 이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국민적 열정은 정부의 정책과 군부의 군사전략과 함께 전쟁을 구성하는 3대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일곱째, 축구에 비교하면 국제정치란 전략적으로 이상하게 가늠할 수가 없다. 참가선수들의 목적은 단순하게 공을 하얀 선을 넘어 몰고 가는 것이지만 국제정치에선 그런 정치활동의 하얀 규칙들이 없다. 그것은 아주 불완전하게 성문화되어 있다. 그래서 정치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그것들을 위반할 것이다. 또한 국제관계에는 축구의 경우처럼 신 같은 심판관이 없다. 모든 국가들이 심판으로 판결하려는 유엔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막상 해당 국가는 그것의 공정성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 집단적 심판관의 결정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여덟째, 월드컵 축구에서는 우승국에 타국들이 편승(bandwagoning)하지 않지만 국내정치에서는 승자에게 모두가 편승하는 후유증을 낳는다. 반면에 국제정치에서는 미묘하게도 승자에게 균형 잡기(balancing)하려는 추세를 보여준다. 국내정치에서 승자에 편승하는 현상은 승자와 구체적 이득을 공유하거나 손실을 막으려는 행동이라면 국가는 승자의 다가올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홉째, 축구에서 승리한 팀의 선수들은 승리의 영광과 함께 엄청난 수고비와 포상금을 받는다. 반면에 정치에서 승자는 모든 것을 얻지만 패자는 약간의 동정심 외에는 얻는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정치는 축구보다도 사실상 훨씬 더 치열하고 잔인한 게임이다. 월드컵에 국가를 대표하여 참가하는 어떤 선수도 목숨까지 걸고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를 대표해 국제정치에 참가하는 외교관이나 군인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

열째, 월드컵 경기에서 우승하면 축구강국으로 인정을 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승국이 국제정치에서 주요 강대국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월드컵의 첫 우승국인 우루과이나 그 후 복수의 승리를 거둔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가 국제정치의 강대국은 결코 아닌 것이다. 역으로 말해서 미국이나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 월드컵에서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국제정치에서 그들을 약소국으로 간주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제 축구경기가 각국의 정치에서 일종의 20세기 서커스로 변한 것은 아닐까? 선수들은 대형 경기장에 모아 놓은 검투사 같은 존재는 아닐까? 월드컵은 자본주의의 가장 화려한 꽃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를 일순간이나마 열광적으로 미치게 하는 양귀비 같은 악의 꽃은 아닐까? 세계의 축구 자본가들은 과거에 '죽음의 상인들'이라고 불리던 무기의 생산 판매업자들과 그 역할에서 아주 다른 것일까? 그래도 전쟁보다는 축구가 훨씬 낫지 않느냐고 자위해야 할까? 그렇다면 월드컵 경기가 열리는 동안에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간 살육의 전쟁은 국제정치의 일시적 돌연변이일까? 유럽인들은 과거 빈번했던 전쟁을 잊고 국가 간 축구경기로 대체감정을 즐겨왔다. 적어도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발생할 때까지 그들은 전사들이 아니라 평화의 소비자였다. 그들은 과거처럼 전쟁영웅이 아니라 축구의 슈퍼스타의 골인에 열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NATO의 존재 덕택으로 냉전체제라는 유럽의 긴 평화의 시대 동안에 열광적 스포츠는 슈퍼스타의 탄생을 통해 평화의 소비자인 유럽인들의 단조롭고 권태로운 삶의 진통제나 일종의 환각제를 제공해 왔다. 그러나 인간들은 언제까지 전쟁영웅이 아니라 스포츠의 슈퍼스타에 열광할 수 있을까? 인류의 역사에서 슈퍼스타의 역사는 짧고 전쟁영웅의 역사는 길었다. 이제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유럽인들은 마침내 제정신이 든 것처럼 전쟁에 대비하여 군비증강과 무장확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는 미소-간 신냉전체제의 형성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국가들도 군비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우리는 축구에 제아무리 열광적이라고 해도 축구가 전쟁을 항구적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축구경기의 열정이 시들고 그 대신에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전쟁영웅의 시대로 다시 복귀할 징후를 보이고 있지는 않을까? 이것이 냉전의 예외적 긴 평화의 시대를 지나 국제정치가 정상화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일찍이 지적했던 것처럼, 국제정치란 언제나 전쟁을 품고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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