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여의대로]“난 진보도 보수도 아닌 박진영” 발언이 ‘통쾌한’ 이유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1110010004778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5. 11. 10. 17:40

최범 객원논설위원
최범 객원논설위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 중인 지난 1일 한중 정상회담 만찬에서 가수 박진영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 앞서 임명받은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시 주석을 만나 한국 가수들의 중국 공연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에 시 주석이 왕이 외교부장을 불러 호응할 것을 지시했다는 얘기가 돌면서 지난 8년간 K-문화 산업을 옭매온 '한한령(限韓令)' 해제 기대감이 급등했다. 이날 만찬 공연에서 시 주석이 가수 지-드래곤 공연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장면은 우리 대중문화의 위상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자칭 '딴따라'로 대중문화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박 위원장이 최근 던진 메시지는 통쾌하고도 엄중하다. 한 TV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 "난 진보·보수 진영 아닌 박진영"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넣은 '제3의 진영'을 직설적으로 언급했다.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진영 갈등으로 찢긴 채 정파적 이해관계에 갇혀 밥그릇 싸움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에 던지는 엄중한 질문처럼 들린다.

우선 박 위원장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논리를 모두 존중하며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는 정부가 간섭하지 않으면 부자들에게 너무 유리하기 때문에 서민 보호를 위한 진보 진영의 정책이 필요하다"면서도 "다른 나라에 비해 과도하게 서민을 보호하면 자본가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보수 진영의 정책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시대 상황과 다른 나라를 보면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위원장의 지적처럼 정치는 선택의 예술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선택보다 균형의 기술을 요구한다. 진보의 이상과 보수의 안정은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양자택일이 아니고 어떻게 균형 잡느냐가 정치의 품격이 된다.

박 위원장의 발언은 한국 정치의 병폐인 진영 논리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현재 정치권에서 건설적인 토론과 합의, 협치가 실종됐다. 여야는 서로를 정책 파트너가 아닌 '적'으로 규정한다. 상대방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내용과 상관없이 '내편 네편'을 갈라 무조건 비난한다.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으면 양쪽으로부터 공격받거나 소외되는 일이 다반사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모두 '극렬 강경파'의 입김이 정책을 좌우한다는 말이 나온다. 균형감각을 지닌 정치의 품격은 눈곱만큼도 찾기 어렵다.

이런 환경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싹을 틔우거나 건설적인 논의를 시작조차 어렵게 만든다. 창조적 상상력이 생명인 문화의 한 축을 책임져야 하기에 "나는 박진영"이라고 선언할 수밖에 없는, 한 진영의 '보호막'을 과감히 차버리는 소위 '반동'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박진영의 고육지계(苦肉之計) 심정이 고스란히 읽힌다.

고육지계는 이겨내고 앞으로 나가기 위한 것이다. 중국 삼국지의 전투인 적벽대전에서 오나라 노장 황개(黃蓋)의 고육지계가 대표적 사례다. 황개는 위나라 조조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살점이 뜯길 정도로 심하게 자신을 매질하게 했다. 조조가 장강의 파도로 인한 뱃멀미를 줄이기 위해 배를 쇠사슬로 묶는 연환계(連環計)를 쓰자 화공(火攻)으로 응수하기 위해 거짓 투항을 하려고 자신을 과감히 희생한 것이다. 황개는 조조의 의심을 받지 않고 20척의 배를 끌고 투항하는 척 다가가 작전을 성공시켰다.

박 위원장은 지난 30년간 정치 성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직책을 통해 정치적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부담감이 '박진영'이라는 입장 표명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황개처럼 살점이 뜯기는 매질을 당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박 위원장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황개와 다른 점은 위계(僞計)를 쓴 게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힌 점이다.

박 위원장이 두 번째로 강조하는 것은 '진정성'과 '실용'이다. 위원장직 제안을 여러 차례 고사하다가 K-문화 산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장관급 예우와 월급까지 모두 거절하며 비상근직으로 활동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직책의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기보다 오롯이 "K-팝 등 대중문화 산업을 위해 회사 차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고자 하는 실용의 자세를 보여준 것이다. 이는 자리와 예우 등 명분 싸움에 몰두하는 한국 정치권과 대조적이다. 대다수 정치인들이 자리에 연연하고 정파적 이익을 우선시하며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본연의 업무를 도외시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우리 정치는 언제부터인가 '나는 보수'와 '나는 진보'로 시작한다. 하지만 유권자인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은 '어느 편'이 아니라 '무엇을 하려느냐'다. 정치권이 박 위원장의 메시지를 한 예술인의 단순한 화제성 발언으로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 대립이 생산적인 긴장으로 작동하려면 그 사이를 잇는 균형의 잣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편 가르는 리더'가 아니라 '편을 넘어서는 리더'다. 박 위원장은 바로 이런 사실을 국민과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최범 객원논설위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