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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영웅적 리더는 기대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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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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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영웅적 지도자는 민주주의 시대에 특별히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평등주의적 환상들에 구두점을 찍고 언제 어디에서나 칭송할 가치가 있는 용기, 겸손, 통찰력, 분별력, 그리고 상상력과 같은 그런 드문 특징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오늘날 사실과 가치의 전적인 이질성에 헌신적인 정치학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방식으로 '카리스마적 리더십(charismatic leadership)'에 전념하고 있다. 조지 워싱턴과 윈스턴 처칠을 한편으로,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와 조셉 스탈린을 다른 한편으로 두지 않고 그들을 모두 하나의 주제로 삼아 진정한 정치가와 선동가나 이데올로기적 폭군을 구별하지 않고 이들 간의 중대한 차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오늘날 정치적 위대성을 말하기 아주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위대한 인간들과 위대한 교과서들을 공부하려고 할 때 그것은 종종 그들의 위대성을 부인하는 명시적 목적으로 위대성을 뒤집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다. 그러나 중요한 예외들이 있었다. 우리 시대에 고전적 정치학을 부활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저명한 정치철학자인 리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는 진정한 정치의 공부가 할 수 있는 기여에 관해서 웅변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1965년 1월 25일 시카고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행해졌다. 그 계기는 윈스턴 처칠의 사망이었다. 그는 정치의 학술적 연구는 최상의 의무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과 학생들에게 정치적 위대성, 인간적 위대성 그리고 인간적 탁월성의 절정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정치학의 과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위대성과 비참함, 그들의 탁월성과 그들의 비열함, 그들의 고결성과 업적의 측면에서 그들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들과 학생들에게 아무리 현란해도 평범성을 위대성으로 착각하지 않도록 훈련시킬 수 있다.

리오 스트라우스는 오늘날 연구자들이 거의 전적으로 무시하는 정치의 '과학적' 연구의 본질적 양상을 간파했다. 즉 인간의 현실을 적절히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동기들과 성취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범하고 따분한 것들을 적절한 조망으로 다루면서 정치적 삶의 드문 절정들을 서술하고 또 이해해야만 한다. 진정한 인간의 위대성은 평범한 인간들을 경멸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한계를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워싱턴, 링컨, 처칠 혹은 드골의 리더십은, 만일 그들이 리더십 이론의 일반 이론하에 다뤄지거나 정치적 삶의 어떤 일반적인 동기로서 '권력'의 카테고리로 축소된다면, 결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토크빌(Tocqueville)은 정치적 위대성에 대한 공부를 현실과 동질화하고 현실을 구성하는 질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민주적인 지적 삶의 경향에 관해서 경고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민주주의 시대에 위대성을 소홀히 하는 민주적 역사가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근대사회의 해석에서 구체적인 개인보다는 큰 일반적 원인들을 우위에 둔다. 이런 강조가 단순히 임의적이지는 않다. 왜냐하면 실제로 근대 민주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은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날 정치적 담론을 지배하는 민주화, 산업화, 도시화, 근대화, 그리고 세계화와 같은 추상적인 것에 친근하다. 이런 추상적인 것들은 정치적 선택을 형성하고 제한하는 진실된 현상을 지칭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무시할 수 없다. 토크빌 자신도 등장하는 민주적 질서를 이해하려고 할 때 그러한 근원적 원인들에 의존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일반적 사실들이 민주적 세기에는 귀족적 세기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소수의 미덕과 악덕이 여전히 사람들의 운명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정치공동체들은 토크빌이 신축성 없는 신(神)의 가호나 맹목적 숙명에만 굴복하지 않는다.

레이몽 아롱(Ramond Aron)은 20세기 사회과학의 다양한 흐름뿐만 아니라 마르크시즘의 지적 지배의 관점에서 토크빌의 분석을 갱신했다. 아롱에 의하면, 마르크스와 꽁트(Comte)와 같은 사회학적 교리들은 역사적 변화, 즉 자본주의, 산업사회, 근대기술사회 같은 근대사회를 전환시키는 변화들에 관한 소중한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과 제국, 승리와 패배의 계속이라는 의미에서 마치 역사가 끝나버린 것처럼 착각했다. 그들은 제국의 흥망, 정체들의 경쟁, 그리고 위대한 인간들의 이롭거나 해로운 착취의 전통적 역사의 양상의 지속성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므로 아롱은 일상적 역사로서 드라마와 과정 그리고 산업사회의 독창성에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정치학과 역사학의 학생들의 과제는 정체의 경쟁과 근대적 삶을 전환시키는 과정에 있고 또 종종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는 독특한 일반적 원인들과 함께 전통적 역사의 변증법적 해석을 분석하는 것이다.

탁월한 정치가들의 생각과 행동의 연구는 올바르게 이해되는 정치학에 중대하며 민주주의 시대 수평적 성향 속에서 인간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것을 다시 일으키는 중대한 수단이다. 우리는 위대한 정치가들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공부해야만 한다. 서양에서는 그런 위대한 정치가들의 전기들을 읽는 것이 독서하는 대중들 사이에 인기가 있다. 이런 습관은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기(傳記) 작가들은 기껏해야 위대한 정치가들이 쓴 글들에 관해서 말만 앞세운다. 많은 역사적 글들이 객관성이라는 좁은 의미에 의해서나 위대성의 카테고리에 저항하는 평등주의적 분노에 의해 너무나 왜곡되어 비상한 정치가들의 위대성에 충분한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 분명히 그런 인간들의 글들은 비판적으로 접근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본보기들과 통찰력을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수용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풍 속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프랑스의 샤를 드골은 그런 위대성을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성격과 항구적인 전제조건들 그리고 근대 평등주의 시대에 그 위대성에 대한 구체적인 위협들에 관해서 정밀하게 생각했다. 그들의 위대성에서 처칠과 드골은 민주적 자유의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정확히 그것의 한계를 기꺼이 직면하고 분별력과 품위의 경계선 내에서 그것들을 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을 기꺼이 해냈다. 하나의 길은 위대한 수사학을 통해서였다. 그들의 때로는 거창한 수사학은 인간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들의 인간적 탁월성에 대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처칠이나 드골은 우리들의 민주정체의 근본적 정당성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반(反)전체주의적 정치가들의 마음은 단순한 민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지평선을 민주적 근대성에 제한하는 다른 인간적 가능성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도 역시 민주적 근대성의 가장 깊은 특징들을 명백히 간파했다.

드골은 전체주의가 대중사회의 부상과 전통적인 도덕적, 정치적, 그리고 정신적인 권위의 부식과 연계된 보다 근본적인 '문명의 위기' 속의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믿었다. 근대 대중사회의 위기와 전개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위협에 관해서 가장 사려 깊은 성찰은 1941년 11월 25일 옥스퍼드대학교에서 행한 드골의 연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처칠은 1925년에 쓴 '근대적 삶의 대규모 영향'이라는 글을 1932년 그의 '생각과 모험(Thoughts and Adventures)'에 실었다. 그것은 평등주의 시대에 인간 위대성의 가능성과 전망에 관한 심오한 명상이다. 처칠은 역사를 대충 훑어보면 모든 순간에 우연과 선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류의 운명이 이미 개인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즉 인간의 역할이 개인과 집단의 운명을 형성하는 결정적 요인이 더 이상 아닌 새로운 상황을 근대성이란 개념이 내포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처칠은 근대 사회의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화 과정을 보았다. 어느 경우에선 경제적 대량생산과 같은 이런 과정들이 사회의 진보와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뚜렷한 경제적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화는 인간과 사회의 성격과 심리에 훨씬 더 많은 의문시되는 영향을 남겼다.

근대 대중사회는 결국 합리적이고 세련되고 고도로 봉사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이런 대규모 효과는 인간 정신의 걸작품들이 나오는 개인적 긴장과 정신적 노력의 조건들을 당연히 파괴할 것이라는 경계심을 덧붙였다. 처칠은 민주적 정의는 인간의 위대성을 대가로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처칠은 인간들의 표준화에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볼셰비크들은 폭정과 공포로 대중적 삶의 가장 완전한 형태와 역사에 유례가 없는 집단화를 수립하려고 시도했다. 처칠은 이미 1925년에 그런 전체주의적 기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은 개미의 본성보다 더 다루기 어렵다고 그는 현명하게 주장했다. 영웅이나 위대한 군사령관이나 훌륭한 스승은 주로 과거 기복이 심한 시대의 잔여 유산들이다. 기술적으로 발전된 사회는 그들을 분명히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표준화된 의견은 그들의 통찰력을 진부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처칠은 동시대인들의 깊은 초조함을 감지했다. "근대 인간들은 그들의 거인들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말한 처칠은 대중적 효과의 세계가 인간적으로 만족스러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 공동체들이 위대한 인간이 없이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것들이 항상 거인들이 했던 것보다도 더 집단적 과정에 의해서 더 나은 지혜, 더 고결한 감정 그리고 더 활기찬 행동을 제공할 수 있을까? 가장 밝은 별들이 연예계와 스포츠계에 있는 세계에서 국가들이 건전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 인간의 정신이 기계들에 의해서 중대한 스파크를 내뿜을 수 있을까? 처칠의 결론은 애매하다. 처칠은 자연이 빈 공간을 혐오하고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표준화된 세계가 제공하는 것보다 더 높은 만족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러나 처칠은 수수하게 지도자의 우상화를 경고하고 우리는 손익계산을 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고지대에는 멋진 정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로 일종의 괜찮은 범인(凡人)에 체념해야만 한다. 그러나 안심하게도 처칠 자신의 행동이 그의 마지막 말이다. 처칠은 기꺼이 위대성보다는 정의를 우선으로 수락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지대가 때로는 평범성과 대중적 효과 이상을 여망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때에 그것은 그들에게 강요된다. 이런 여망이 없이 민주주의는 우리 본성의 최고의 능력에 말을 하거나 고무할 능력을 잃는다.

민주적 개인들을 그들의 잠에서 일으키기 위해서는 1861년이나 1940년의 질서 아니면 심지어 2001년 9·11 테러 사건과 같은 심각한 위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화가 지배하는 한 민주적 정의의 질서는 그 자체를 지탱하기 위해서 위대성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 위대성은 충분히 넓은 폭의 인간적 가능성을 유일하게 상기시키기도 한다. 링컨, 처칠 그리고 드골과 같은 정치가들의 생각과 행동은 민주적 국민들의 시민적이고 도덕적인 건강에 중대하다. 그것은 또한 정치(政治)가, 심지어 민주정치조차도 원칙적으로 도달해야 할 높은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할 것이다.

동시에 카리스마적 리더십에게는 선동적 호소에 의해서 제기되는 위험들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여야만 한다. 우리는 헌정주의와 법의 지배가 자유롭고 문명화된 정치질서의 불가결한 토대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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